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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일 May 21. 2024

급과 격

역사 이야기

문경지교, 죽음도 대신할 만큼 친밀한 사이를 뜻하는 고어입니다. 관포지교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이오와 포숙아의 고사이고 문경지교는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와 염파의 고사입니다. 주나라가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하면서 중국 서쪽 주나라의 광대한 옛 땅은 진(秦)나라가 차지합니다. 춘추시대 진(秦)나라는 동쪽에 있는 강력한 진(晉)나라로 인해 중국 서쪽의 패권국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晉)나라가 한, 위, 조로 삼분되며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진(秦)나라가 초강국이 되어 한, 위, 조, 제, 초, 연나라를 압박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진나라가 상앙의 개혁 이후 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의 일화입니다.     


인상여는 조나라 환관인 무현의 식객입니다. 오척 단신인 인상여는 달변에 목소리가 우렁찼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목소리는 나름 유효하게 기능하나 봅니다. 무현이 우연히 얻은 화씨벽(중국의 유명한 보물)이 사건을 만듭니다. 조왕이 무현에게 화씨벽을 요구하고 무현이 거절하자 강제로 빼앗습니다. 소문을 들은 진왕이 조왕의 화씨벽을 탐냅니다. 진왕은 화씨벽을 주면 진나라 성 15개를 주겠다고 조왕에게 제안합니다. 성 15개는 작은 나라를 세울 정도로 넓은 땅입니다. 조왕이 난감해집니다. 진나라에 화씨벽을 보내더라도 성은 단 한 개도 주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거절하면 강한 진나라가 어찌 나올지 후환이 두렵습니다. 조왕의 고심이 깊어질 때 무현이 인상여를 천거합니다. 인상여의 강단과 기지로 진나라에 갔던 화씨벽이 무난히 돌아옵니다. 물론 큰 목소리도 한몫합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성 하나를 빼앗고는 조왕과의 회견을 요구합니다. 진왕은 회견을 빌미로 초나라 왕을 잡아 죽을 때까지 감금한 전력이 있습니다. 조왕이 노심초사합니다. 이번에도 인상여의 기지로 조왕은 진왕과 회견하고 무사히 돌아옵니다. 조왕이 인상여의 용기에 대해 묻습니다. 인상여가 대답합니다. “진정한 책략은 용기에서 비롯합니다.” 조왕이 인상여를 재상에 임명합니다.     


조나라에는 맹장 염파가 있습니다. 수많은 전공을 세운 염파는 세 치 혀로 재상이 된 인상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염파는 인상여를 만나면 혼내주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닙니다.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게 피해 다닙니다. 염파 장군이 그렇게 두렵냐고 한 측근이 인상여에게 묻습니다. 인상여가 답합니다. “진왕이 더 두려운 존재인가? 아니면 염파가 더 두려운 존재인가?” 측근이 진왕이라고 답하자 인상여가 말합니다. “진왕도 두려워하지 않은 내가 어찌 염파를 두려워하겠는가?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다투면 둘 다 상하게 된다. 진나라가 바라는 바다. 내가 염파를 피하는 것은 사사로운 감정보다 나라의 안위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인상여의 말을 전해 들은 염파가 웃통을 벗고 회초리를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부복합니다. “재상의 큰 뜻을 몰랐습니다. 이 회초리로 미천한 인간을 벌해 주십시오.” 인상여가 염파를 일으켜 세우고 목숨마저도 내어 줄 친교를 나눕니다. 두 사람이 있어 진나라는 조나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신의(信義)에는 격이 있습니다. 저잣거리 건달들의 ‘신의’는 ‘의리(義理)’라고 해야 합니다. 신의에 정의(正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끼리 나쁜 짓 하며 그저 뒤통수치지 않는 것을 신의라 한다면 범죄도시의 장첸이 웃습니다. 일반화에는 문제가 있지만, 끼리끼리 무리 지어 나라가 부여한 권한을 사적 이익에 사용해 온 몇몇 정치 검사들의 관계 또한 신의가 아닌 의리입니다. 나랏일을 하면서도 가슴 속에 국가를 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급은 높을지 몰라도 낮은 격의 사람들입니다. 이익이 일치할 때만 상부상조하는 연결고리가 미약한 연대 같은 것입니다.

     

비록 몸은 미천한 곳에 있어 급(級)은 낮더라도 격(格)은 지키며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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