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말기인 960년, 후주의 장군 조광윤이 후주의 공제로부터 선양 받아 송나라를 창건합니다. 송태조 조광윤은 선양 후 전 왕조의 일족을 말살하던 관례를 깨고 후주의 황실이었던 시씨를 보호하고 우대합니다. 이 정책은 송나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시씨는 남송의 마지막인 원나라와의 애산전투(1279년)에서 송나라와 최후를 함께하며 의리를 지킵니다. 오대십국의 통일은 송태조의 동생이자 2대 황제인 조광의에 의해 완성됩니다.
송나라의 북쪽에는 907년 건국한 거란족의 나라 ‘요’와 1115년 건국한 여진족의 나라 ‘금’이 있습니다.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993년부터 26년간 여요전쟁을 일으켜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던 그 요입니다. 1125년에 요를 멸망시킨 금은 이듬해 고려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하고 고려가 이를 수용합니다. 금과 송은 몽골족의 나라인 원에 멸망 당합니다.
송나라 건국 이전, 후당의 관리였던 석경당이 황제와 반목합니다. 석경당은 중국 북쪽의 연운16주(북경 일대)를 요에 바치는 조건으로 원군을 얻어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건국합니다. 고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의 역사입니다. 연운16주는 요의 영토가 됩니다.
송나라는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16주를 회복해 북방 국가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송의 북벌은 성과 없이 끝나고 오히려 요가 송을 공격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송과 요는 상대를 압도할 국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송은 요에게 해마다 세비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1004년 ‘전연의 맹’을 맺고 평화를 삽니다. 이후 내부의 실정으로 국력이 약화된 요는 1125년 송과 금의 협공을 받아 금에 멸망 당합니다.
문관중심의 송나라는 이웃나라와의 갈등을 돈으로 해결합니다. 여기에 황제의 실정까지 더해져 재정을 탕진합니다. 중국 4대 기서의 하나인 수호전의 배경이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송이 금에게 주기로 약속한 공물을 주지 않자 금이 송을 공격합니다. 1126년, 송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는 정강의변(한족 입장에서 이민족에 당한 3대 굴욕의 하나)이 일어나 송의 황족과 관료 수천 명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양자강 남쪽으로 탈출한 황제의 동생이 임안(항저우)을 도읍으로 송나라를 이어갑니다. 이를 남송이라 하고 구분하여 이전의 송나라를 북송이라 합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송나라에는 악비가 있습니다. 1103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악비는 1122년 군에 입문합니다. 금에 의해 개봉이 함락되고 북송이 멸망하자 악비는 남송으로 내려가 금에 저항하는 창이 되어 중원 수복을 위해 분투합니다.
정강의 변으로 포로가 돼 만주로 끌려간 진회가 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진회가 남송의 재상이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으로 참화를 경험한 진회는 철저한 주화파가 됩니다. 진회는 금과의 평화교섭에 걸림돌이 되는 악비를 반역의 누명을 씌워 죽입니다. 악비를 죽인 이듬해인 1142년, 송과 금은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송이 매년 엄청난 공물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춘다는 굴욕적 조건입니다. 실권을 잡은 진회는 천수를 누리며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천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악비는 영웅의 이름으로, 진회는 간신의 이름으로 남습니다. 악비는 사후 신원이 이루어지고 왕으로 추대돼 악왕이라고도 합니다. 항저우에 있는 악비의 무덤 앞에는 진회 부부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동상이 있습니다.
악비의 시호는 충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순신 장군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악비의 전공은 중국인 특유의 과장이 많다는 평가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세계 전쟁사에서 비교불가한 독보적 존재입니다.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