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태백산맥을 읽었습니다. 30여 년 전,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네요. 시대의 변함도 있겠지만, 일가를 이뤘고, 나이가 들었고, 조금은 보수화된 탓도 있겠지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든, 불합리한 경제구조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든, 빨치산이 되어 산속에서 고난한 삶을 마쳐야 했던 그 시대에 대해 많은 생각이 오갑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의 옳고 그름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단할 수 없겠지요. 그들은 사회주의를 통해 평등사회라는 유토피아를 현실 세계에서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이상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정치제도의 한 형태를 넘어 종교 같은 존재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당대의 두 부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실현을 꿈꿨던 지식인과 신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던 해방공간에서 목숨을 이어가기에도 버거웠던 하층민의 분노가 그들을 산으로 이끕니다.
지식인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념과 사회적으로 냉대받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인간적으로 평등한 대우 받으며 살 수 있었던 몇 년간의 빨치산 생활이 죽음으로 맞이할 종말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라 믿습니다.
“동무덜 심내. 우리가 요 고상하는 것은 말이시, 역사발전이니 머니 하는 에로운 말 접어두고 쉰 말로 혀서, 니나 나나 차등 없이 서로가 서로럴 사람 대접험스로 사는 시상얼 맹글자는 것이여, 시방 우리가 서로럴 동무 삼음서 사는 요런 시상 말이여. 고상 끝에 낙이라고, 고런 시상이 필경 올 것잉께 꼭 믿음서 고상덜 참아내드라고잉.”
결국 산에서 죽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희생이 언젠가는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이룰 밑거름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 사회주의의 현실을 보면 어떤 감정일까요?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며 무가치한 것에 목숨을 버렸다는 자책일까요? 아니면 민주주의 속에 침착된 사회주의적 요소를 보며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안도할까요? 우리 제도 속의 수정자본주의 중 피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게 답이 될까요?
이념이 배제된 소설 태백산맥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좌든 우든 이념을 근간으로 태백산맥을 대한다면 오히려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듯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 속 한 장면이니까요.
첫 번째도 이번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문장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당신이 겪은 경험에 예속되거나 또는 피해를 입은 보복감정으로 가치를 설정하거나 판단의 기준을 삼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탈피하지 못하면 생각이 왜소해지고, 사태를 오판하게 되고, 사람을 오해하게 되고, 스스로 외로워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