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기원전 841년, 주나라 10대 여왕이 폭정을 일삼자 백성들이 봉기해 왕을 쫓아냅니다. 이후 14년 동안 신하들이 공동으로 왕이 없는 주나라를 다스립니다. 이 시기가 오늘날 공화제의 어원이 되는 공화(共和)라 하고 이때부터 중국 역사의 연대가 명확해집니다. 기원전 828년, 주여왕이 망명지에서 죽자 아들 정이 왕위에 올라 주선왕이 됩니다. 주선왕은 46년간 왕위에 있으며 주나라의 중흥을 이끕니다. 주선왕이 동생 우를 정나라 군주에 봉합니다. 우가 정환공이 됩니다.
주선왕이 죽고 아들 주유왕이 뒤를 잇습니다. 포사, 거짓 봉화, 천금매소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라 말희, 상나라 달기와 함께 경국지색의 대명사가 된 포사로 인해 주나라는 패권을 잃고 춘추시대의 상징적인 종실로 전락합니다.
주유왕의 정비는 제후국인 신(申)나라 출신의 신후(申后)였고, 둘 사이에 태어난 의구가 태자입니다. 왕과 포사 사이에 백복이 태어납니다. 왕은 신후와 의구를 폐하고 포사를 정비로, 백복을 태자로 삼습니다. 소국이었던 신나라 제후는 중국의 입장에선 서이(西夷)에 해당하는 견융(犬戎)을 주나라 수도 호경에 있는 부고의 보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끌어들입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의 군대가 호경으로 진격합니다. 주나라가 봉화를 올려 위기를 알리면 제후국들은 군사를 동원해 종실인 주나라를 구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몇 차례 거짓 봉화에 속은 제후국들이 거병하지 않습니다. 주유왕의 숙부이자 주나라에서 벼슬을 살고 있던 정환공 우가 어가를 호위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견융이 쏘아댄 화살에 최후를 맞습니다. 왕과 백복을 죽인 융주가 포사를 취합니다. 정환공의 아들 굴돌이 정나라 군사를 이끌고 부친의 원수를 갚고 호경을 구하려 합니다. 이어 도착한 위(衛), 진(秦), 진(晉)의 군사들과 함께 호경을 공격합니다. 급했던 융주는 포사를 버려두고 본국으로 도망갑니다. 남겨진 포사는 목을 매 자살합니다.
의구가 왕위에 올라 주평왕이 됩니다. 정나라는 굴돌이 군위에 올라 정무공이 됩니다. 주나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대가를 톡톡히 치릅니다. 한번 중국을 경험한 견융에게 중원은 더 이상 금단의 땅이 아닙니다. 기원전 770년, 견융이 침입이 잦아지자 주나라는 호경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320km 떨어진 낙읍으로 천도합니다. 주나라의 근원지인 서쪽 땅은 훗날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진(秦)나라가 차지해 강대국으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합니다.
기원전 806년에 창업한 정나라의 정환공과 정무공은 주왕실의 충신이었지만, 3대 정장공은 주나라 환왕과의 전쟁도 불사합니다. 삼국지의 조조와 닮은 간웅인 정장공은 춘추 5패에는 들지 못하지만, 춘추의 시작을 정나라의 시대로 만듭니다. 그러나 정장공 사후 정나라는 급격히 몰락합니다.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 일대를 도읍으로 하는 정나라는 황하를 기반으로 하는 중원세력과 장강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초나라의 가운데 위치하여 기원전 375년,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의 한나라에 병합될 때까지 끝없는 고초를 겪게 됩니다.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초나라와 이를 저지하려는 진(晉)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끝없이 강요당합니다. 진을 선택하면 초의 군대가, 초를 선택하면 진의 군대가 도성인 형양성 아래 진을 치는 역사가 반복됩니다. 결국 정나라는 진이 오면 진과, 초가 오면 초와 화친을 맺는 성하지맹(城下之盟)의 굴욕적인 역사를 이어갑니다.
기원전 580년, 정나라에 자산이 태어납니다. 기원전 543년, 재상이 된 자산은 진과 초라는 강국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 정나라의 안정을 도모합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어 법치주의의 기틀을 세웁니다. 지배층 입장에서 백성들을 다루기에는 성문법보다 관습법이 더 효율적입니다. 이로 인해 자산의 성문법은 정나라 귀족은 물론 이웃 나라의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자산은 세제와 토지개혁을 통해 정나라 경제를 안정시킵니다. 세제개혁은 귀족들의, 토지개혁은 백성들의 저항을 받지만, 뚝심 있게 추진합니다. 정책이 성과를 만들어 내자 자산을 저주하던 백성들의 비방이 칭송으로 바뀝니다. 기원전 522년, 자산이 죽자 백성들이 통곡합니다. “자산이 우리를 버리고 갔구나!,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사마천은 사기의 순리(循吏)열전에서 자산에 대해 언급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공자도 춘추좌전에 자산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자산은 제나라 관중, 초나라 손숙오, 제나라 안연과 함께 춘추시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깁니다. 그러나 제, 초와는 달리 자산은 약소국의 재상으로 이룬 성과였기에 더 큰 가치가 있습니다.
자산에 대한 맹자의 평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폭우로 개천을 건너지 못하자 근처를 지나던 자산이 수레로 건네준 일이 있습니다. 맹자가 탄식합니다. “자산이 어진 재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울 건너는 일은 지방 관리에게 맡기고 홍수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능력자가 어질기까지 하면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자산이 죽자 정나라는 이전의 정나라로 돌아가 존립을 걱정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리더는 명예직이 아닙니다. 권력을 탐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오르면 그 대가를 국민이 치릅니다.
사마천이 사기에 언급한 자산에 대한 글입니다.
재상이 된 지
1년이 지나자, 버릇없는 아이가 없어지고, 노인이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 아이들이 밭갈이하지 않게 되었다.
2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물건값 속이는 일이 없어지고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어졌다.
4년이 지나자, 밭 갈던 농기구를 놓아둔 채 집에 와도 되고
5년이 지나자, 전쟁이 없어지고, 상복 입는 기간을 스스로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