죗값

역사 이야기

by 오세일

왕정으로 시작한 로마는 7대 왕인 폭군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쫓아내고 1년 임기의 선출직 집정관 두 명이 국정을 담당하는 공화정으로 전환합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자가 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합니다. 도시국가 시절에 정착된 공화제로는 거대국가 로마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로마는 극도의 혼란을 겪으면서 점진적으로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원전 247년, 파르티아가 알렉산더에게 멸망 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칭하며 이란 북부에서 창업합니다. 이후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한 파르티아는 로마와 한나라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습니다. 멀리 떨어진 동쪽의 한나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파르티아와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로마는 서아시아 지역에서 대치합니다.


1차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던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군적을 세우지만,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나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고 동방을 재편한 폼페이우스에 비해 공적이 미약합니다. 전공이 필요했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를 주목합니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그리스가 번번이 막아냈고,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 당한 역사가 있어 로마는 파르티아를 얕잡아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크라수스는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던 파르티아를 단지 자기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침략을 결정합니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4만 3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카레(현 튀르키예 하란)로 진군합니다. 파르티아는 장군 수레나스가 1만 명의 기병으로 맞섭니다. 수레나스는 기동력과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로마군에게 궤멸 수준의 승리를 거둡니다. 패장 크라수스는 전사했다고도 하고 협상을 위해 갔다가 처형당했다고도 합니다. 카레 전투는 한니발과의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됩니다.


1951년, 이란 총리인 모하마드 모사데그는 석유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이란 석유산업의 이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모사데그는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팔라비 왕가와 반목합니다. 모사데그는 석유산업 수익의 이란 몫 16%를 50%로 바꾸자며 영국과 협상을 시도하지만, 영국은 이를 거절하고 이란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세웁니다. 영국은 경제제재와 석유수출을 봉쇄해 모사데그를 압박하고, 이로 인한 경제 악화와 정치적 혼란은 모사데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립니다. 1953년, 영국은 미국과 함께 쿠데타를 배후 조종합니다. 모사데그는 축출되고 팔라비 왕조는 친미 독재정권을 강화해 나갑니다. 서구 국가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감은 1979년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는 이란혁명의 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민주주의와 신정정치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이란 정치체제가 우리 시각으로는 생소해 보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든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 긍정적 결과를 만든 사례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정치와 종교의 분리 여부는 이란 국민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최근 민주화 시위에 대한 반인륜적 무력 진압은 이란 정권을 비난할 충분한 사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침략의 명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4.19와 5.18을 빌미로 공격한 나라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침략인 것과 같습니다.


전쟁에 명분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렇고 이란 전쟁이 그렇듯, 필요가 곧 명분이 되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핵과 이란의 핵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는 순간 ‘핵 위협 제거’라는 명분은 가치를 잃고 말았습니다. ‘평화를 위한 핵’과 ‘위협이 되는 핵’의 기준은 누가 무엇으로 정하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여도 벌주기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天道不容(천도불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공정해 악인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크라수스에게서 트럼프를 봅니다. 명분 없는 전쟁에 크라수스는 목숨으로 죗값을 치렀지만, 트럼프는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간 죗값을 무엇으로 치를 건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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