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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일 Jan 05. 2023

한 사내가 있습니다.

역사 이야기

기원전 400년대를 범상치 않게 살다 간 한 사내가 있습니다. 영웅들의 시대에 가신(家臣)의 신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남기고 간 사내, 섬기던 주인을 위해 다소 우스꽝스러운 복수극을 연출한 사내, 그리고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라는 문장을 세상에 전한 한 사내가 있습니다. 그 사내의 이름은 예양입니다.


춘추시대 강력한 패권국이었던 진(晉)나라는 후반기에 이르러 한, 위, 조, 지, 중행, 범씨의 여섯 가문에 권력이 분산되고 이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합니다. 신하가 군주를 핍박하는 반역의 시대, 한과 위와 지씨가 연합해 조씨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순간, 한과 위씨의 배신으로 지씨가 몰락합니다. 지씨의 몰락과 함께 진나라는 한, 위, 조로 삼분되고 춘추시대는 삼백여 년이라는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예양은 가장 강했던 지씨의 가신입니다. 종주인 지요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욕심 많고 인덕이 부족합니다. 지요가 조씨의 수장인 조무휼에게 무례하게 행동해 두 가문은 원한이 깊습니다. 조무휼은 지요의 두개골로 요강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지요에게 당한 한풀이를 합니다. 살아 남은 예양이 조무휼을 죽여 지요의 복수를 하려 합니다.


자객 예양이 조무휼의 집에 잠입했다 사로잡힙니다. 승자의 여유였는지 조무휼이 예양의 충의를 칭송하며 살려줍니다. 조무휼의 명성만 높이게 된 예양에겐 오히려 죽음이 선물입니다. 산 가족을 위해 죽은 지요를 잊어 달라는 아내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하고 조무휼을 죽이기 위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기행을 시작합니다. 나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온몸에 옻칠하고, 목소리를 바꾸려고 숯을 먹습니다(칠신탄탄, 漆身呑炭). 자학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예양의 고행이 죽은 지요를 위한 것이든 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조무휼의 죽음이 목적이든 자학 자체가 목적이든 복수를 위한 두 번째 시도가 이어집니다.


조무휼이 지나갈 다리 아래 숨어있다가 또다시 붙잡히는 신세가 됩니다. 조무휼이 묻습니다. “너는 범씨를 섬기다 범씨가 지씨에게 망할 때 스스로 지씨의 가신이 되었다. 옛 주인 범씨를 멸한 지씨는 섬겼으면서 왜 유독 지씨의 원수는 갚으려 하는가?” 예양이 답합니다.


“범씨는 나를 평범하게 대했소. 범씨에 대한 의무도 평범할 수밖에 없소. 그러나 지씨는 나를 각별하게 대했소. 지씨에 대한 의무도 각별할 수밖에. 어찌 범씨와 지씨가 같을 수 있겠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사기의 예양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무휼이 칼을 풀어 예양에게 던지자 예양이 조무휼에게 겉옷을 벗어 달라 청합니다. 조무휼의 옷을 비수로 세 번 찌르고 난 뒤 죽어 지씨를 모시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칼을 꽂습니다. 이백 년의 세월이 더 지나 진왕(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연나라 자객 형가의 죽음이 전국시대의 마무리였다면, 예양의 주검에 번지는 핏자국과 함께 춘추시대라는 기나긴 여정도 막을 내립니다.


이해(利害)가 선택의 기준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시비(是非)를 따지며 판단하는 자는 도태되는 세태입니다. 자존심을 놓지 못해 험난한 시절을 보내며 그 사내를 생각합니다.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다가도 그 어리석음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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