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역사 이야기

by 오세일

기원전 553년, 제나라 폐세자 광은 최저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라 제장공이 됩니다. 최저는 본부인이 죽자 당강이라는 절색의 과부를 부인으로 맞습니다. 제장공이 최저의 집에 들렀다 당강의 미모에 반해 최저 몰래 당강을 품습니다. 최저가 병들었다 소문내고 문병 온 제장공을 죽입니다. 시대를 떠나 최저는 죽일 만했고 제장공은 죽을 만했지요. 그러나 군주를 시해한 불충한 신하로 기억되길 원치 않았던 최저는 진실을 왜곡하려 합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인 태사 백을 불러 “제장공이 학질로 죽었다.”라고 기록하게 합니다. 만일 그가 최저의 말을 따랐다면 세상은 2,5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태사 백’이란 이름을 전하지 않겠지요.


태사 백이 기록합니다. “최저가 그의 임금 광을 죽였다.” 최저가 태사 백을 죽입니다. 그의 동생 중을 불러 지시합니다. 태사 중이 기록합니다. “최저가 그의 임금 광을 죽였다.” 최저가 태사 중을 죽입니다. 그의 동생 숙을 불러 지시합니다. 태사 숙이 기록합니다. “최저가 그의 임금 광을 죽였다.” 최저가 태사 숙을 죽입니다. 그의 동생 계를 불러 지시합니다. 태사 계가 기록합니다. “최저가 그의 임금 광을 죽였다.” 질린 최저가 계에게 말합니다. “너의 형 셋이 목숨을 잃었다. 시키는 대로 써라. 살려주마.” 계가 답합니다.


“내가 맡은 직분은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입니다. 직분을 잃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이 나를 협박해 기록을 바꾸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기록할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역사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자 이제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최저가 포기합니다. 태사 계가 급히 들어오는 동료 사관 남사씨와 마주칩니다. “무슨 일로 이리 바쁘게 오시오?” “그대 형제들이 다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사건을 후대에 전하지 못할까 염려돼 달려오는 길이오.” 남사씨는 계가 보여주는 기록물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돌아갑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맹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릅니다. 아테네는 도시 대부분을 페르시아에 점령당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때 페르시아로부터 전쟁에 관여하지 않으면 파괴된 모든 도시를 재건해 주고, 전후 그리스의 주인이 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 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는 혹시라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걱정돼 아테네에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스파르타가 제안한 식량원조의 저의를 알게 된 아테네의 답변입니다.


“재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스파르타의 생각은 진정한 가치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니 굳이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아테네의 진정한 정신인 정의와 용기는 보지 못하고 단지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으로 아테네를 적들과 싸우게 하겠다는 스파르타의 발상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자유와 바꿀 수 있는 재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저 해가 떠 있는 한 아테네는 그리스를 짓밟고 신전을 더럽힌 페르시아와 싸울 것이다.”


삼니움족을 제압해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기원전 283년, 스파르타의 식민지로 출발한 남단의 도시국가 타렌툼을 공략해 이탈리아반도 전체 패권을 장악하려 합니다. 스파르타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싸움을 싫어했던 타렌툼 시민들은 자국의 방어를 용병을 고용해 해결하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전략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전쟁 자체를 즐겼던 피로스가 타렌툼의 용병으로 로마와의 전쟁을 대행합니다. 피로스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란 명성대로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고 조건부 강화를 제안합니다. 피로스의 전투력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가 제안을 수용하려 합니다. 그때 노령으로 시력까지 잃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에 나타나 ‘피로스를 벌하지 않고 강화하면 세상은 로마를 우습게 여길 것이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로스와 맞서게 될 것’이라는 연설로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로마가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버티고 있는 한 로마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결의도 함께 전달합니다.


로마와 피로스가 강화를 조율하는 과정에 로마군 포로의 석방 문제를 논의합니다. 로마가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려 하자 피로스는 장사를 위해 이탈리아에 온 것이 아니라며 조건 없이 600명의 포로를 석방합니다. 로마는 오히려 강화가 성립되지 않으면 포로들을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결국 로마의 거절로 강화가 무산되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 가족과 재회했던 600명의 로마군 포로들은, 돌아가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로마 원로원의 명령이 있기는 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타렌툼으로 돌아가 다시 포로가 됩니다.

이때 피로스의 시의(侍醫)가 피로스를 죽여주면 얼마를 주겠느냐며 로마와 흥정합니다. 간사한 음모를 용납할 수 없었던 로마는 피로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의 시의가 보낸 편지를 동봉합니다. 이 편지를 보내는 것은 로마가 당신을 암살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전쟁에서 이겼다는 누명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호의에 감동한 피로스가 다시 로마군 포로를 석방하자 로마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야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사체 썩는 악취가 진동해야 할 전장에서 장미꽃다발이 오고 갔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는 또다시 피로스에게 패합니다. 그러나 피로스가 입은 전력 손실 또한 커서 승리를 기뻐할 처지가 아닙니다. 로마의 병력 손실은 즉시 보충되지만, 타국에서 싸우는 피로스의 병력 손실은 치명적입니다.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얻은 승리라는 의미의 ‘피로스의 승리’가 만들어집니다. 시칠리아로 떠났던 피로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와 로마와 격돌합니다. 3년을 준비한 로마는 피로스 군을 격파하고 그리스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타렌툼을 함락시킨 로마는 드디어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다 해도 한 시대를 지탱하는 맑은 정신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시대정신이라 합니다. 20대 대선을 지켜보면서 2021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있기는 한 건지 혼란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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