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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오소리 Oct 06. 2020

나이가 들었다고 느낄 때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이야.

어려서부터 유행에 관심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패션 관련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입사했다고 쓸뻔한 걸 보니 정말 학창시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버렸다했던 덕에 복식사 공부를 참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말에 초등학교 고학년, 2000년대에 10대를 보내고 20세기 복식사를 배우던 2000년대 후반의 시기까지, 트렌드의 흥망성쇠는 물론 사람들이 입는 옷의 실루엣과 치마의 길이가 거짓말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을 목격해 왔었다.

슬플 때 힙합을 추는 현겸이처럼 힙합댄스며 음악과 패션이 유행을 선도했던 시절도 있었고, 사회초년생과는 거리가 먼 10대조차 블레이저에 스커트를 세트로 입거나 슬랙스를 즐겨 입고, 이도저도 안 되면 노티카 점퍼에 폴로 셔츠와 면바지에 워커를 신으면 만사가 해결되었던 90년대 말, 힙합바지와 통바지가 지나가고 부츠컷이 활개치던 2000년대 초, 케이트 모스의 등장과 함께 하루아침에 다리에 깁스를 한 양 스키니팬츠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깡마른 몸매가 유행하던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 어느새 2020년이 되었고 나는 서른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건만 유행만은 어렸던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거짓말처럼 90년대 말 나의 초딩시절과 같은 스타일링이 2020년을 잠식하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명품들이 자극적이고 거대한 로고를 달고 나타나 Flex라는 명목으로 젊은이들의 돈을 쓸어담고 있고, 죽었던 캐주얼 브랜드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박시한 핏과 정장 스타일은 물론 어글리슈즈며 레깅스와 아노락 등 스포티한 패션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그나마 그때 그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마켓도 개인의 인식도 한층 진화한 덕에 사람들이 자기 개성을 알고 본인의 체형에 맞는 스타일링을 하는 것이 좀 더 자유롭고 쉬워졌다는 것. 천편일률적 실루엣과 체형을 지향하지 않게 되면서 필라테스로 다져진 글래머러스한 근육질 몸매도, 하이패션에서 튀어나온 듯 스키니한 몸매도, 핀업걸처럼 포동포동한 몸매도 각각의 매력을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쇼핑으로 직구가 활성화되고, 인스타그램의 등장으로 모든 유행이 글로벌 단위가 되었으며, 해외 SPA 브랜드가 유입되면서 44며 55며 천편일률적이던 사이즈에 대한 부담도 줄어들었고, 선택의 폭도 넓어진 덕이 아닐까. 패션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성이 확대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쥐고 흔드는 대로 사람들의 옷매무새가 출렁이는 모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습게도 유행이 지날 때마다 헌옷수거함에 쳐박아 버렸던 옷들이 그리워진다. 유행에 편승하겠답시고 내 어린 시절과 똑같은 모습을 한 젊은이들이 거리마다 넘실대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오로지 나의 시간만은 멈추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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