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13)
최근에 해 먹었던 요리 이야기를 써 보겠답시고 시간만 허비하다가, 제목 말고는 도무지 쓸 거리가 안 나오는 탓에 아예 임시저장본 자체를 지워 버렸다. 흰 여백과 커서 앞에서 무력해졌던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아이디어가 안 나와서 겪었던 갑갑함이 너무 순식간에 해소되어 조금은 허탈할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그 글은 쓰지 말 걸 싶다가도, 이걸 접어버린 결정으로 인해 다른 글을 수월하게 써 내려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요리를 해 볼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찰나, 인스타그램에서 (내 기준) 신문물 파피요트를 발견했다. 오븐이 없어도 되고, 맛있어 보이는 비주얼 덕에 있어빌리티를 극대화할 수 있는 담백하고 건강한 생선 요리라니! 이렇게 나는 또다시, 어버이날 저녁 식탁은 내 손에 맡겨라- 라며 생전 먹어본 적도 없는 요리에 자신있게 도전장을 내밀고 말았다.
레시피 10개만 읽고 나면 대충 감이 오겠다 싶어 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파피요트의 재료 다양성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해서, 연어, 광어, 숭어, 가자미, 삼치도 모자라 심지어 닭가슴살까지 온갖 재료가 주재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혹자는 파피요트를 냉파에 적합한 메뉴라고 할 만큼 채소도 정말 자기 마음대로 넣고 싶은 걸 다 넣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허브도 로즈마리, 타임, 딜 등 생선 종류에 따라 다양한 허브가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무슨 재료를 넣건 빼건간에 생선 다음으로 중요한 레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수없이 다양한 주/부재료와 레시피 가운데 무엇이 과연 최선일 것인가! 를 파일럿 테스트로 해보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그래서 그냥 느낌대로 저질러 보기로 했다. 삐- 도전!
재료 (5인분 기준, 코로나 시대에 유일하게 허용되는 직계가족 모임을 위하여)
재료의 선택지가 너무 많을 경우, 주재료부터 정하고 시작하면 이후의 선택이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기름기가 적어 깔끔하고 담백하며 비린맛도 상대적으로 덜해, 가장 무난한 無맛의 흰살생선인 광어로 메인 생선을 결정했다. 손질된 광어를 어디서 조달할지 온라인으로 검색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파피요트 밀키트라는 것을 발견했다. 큼직한 활 바지락과 손질된 새우, 레몬과 각종 야채, 소스를 담아 판매하는 패키지였는데, 새우, 조개류를 더하면 국물 맛이 한창 업그레이드 된다는 정보가 있었던지라 해당 밀키트 2팩(총 4인분)를 부모님 댁으로 주문했다.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기는 했지만,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다음 날의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한식만 주로 해 드시는 부모님 댁에서 요리를 해야 하는지라 소소한 디테일을 챙겨야 하는 것이 많았다. 수입 식재료를 소량 구입할 때는 오히려 백화점 식품관에서 구입하는 편이 실용적인 경우가 왕왕 있어, 부모님 댁 인근에서 구하기 어려울 법한 재료는 백화점 지하에서 구입했다.
아래 재료를 2개 접시로 나누어 요리했다.
주 재료: 광어 1마리(손질 전 2-3kg 중 사이즈). 부모님 댁의 동네 단골 횟집에서 구이용으로(필렛) 손질을 요청했고, 지느러미 부분 횟감과 서더리탕 재료까지 야무지게 챙겨 왔다. 몸통을 길다란 4조각으로 나눠주는데, 한 접시당 2조각씩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사용했다.
해물: 흰다리 새우살 360g, 활 바지락 400g (밀키트 활용, 해당 분량을 반반 나누어 썼다. 바지락은 1팩이 400g이라 1팩만 썼음에도 훌륭했다고 한다)
채소: 방울토마토 12-15개, 작은 가지 1개, 레몬 1 1/2개, 애호박 1/3개, 슬라이스한 양파 약간, 아스파라거스 윗부분 기준으로 12줄 정도, 파프리카 (큰것 기준 1/4개 분량으로 1-2가지 색), 그리고 (한식을 주로 드시는 가족들 기준으로 허브 중 가장 무난할 듯한) 로즈마리 잎 약간.
화이트 와인: 샤도네이, 샤도네이, 샤도네이. 지난번 요리에서 달달한 와인을 썼다가 실패했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샤도네이를 썼다. 레시피상으로는 1접시당 3큰술 정도인데 좀 더 넣어도 된다.
기타: 소금, 후추, 올리브유 약간. 평소에 올리브유를 쓸 일이 거의 없다면 소량으로 판매하는 작은 병을 구입하면 좋다. 그리고... 감자? (후술하겠다)
종이호일: 가능하면 세로폭이 넓은 종이호일을 준비한다. 시판되는 것 중 세로폭 30cm인 것 정도면 무난했다. (종이호일, 유산지, 기름종이.. 결국 다 똑같은 친구들이다.)
옵션: 브로콜리 약간을 넣으면 맛있다던데 잊어버렸다. 버터의 풍미를 원하면 소량으로!
부식으로 만든 파스타 2종: 리가토니 300g, 시판 소스 2종 (바질페스토, 토마토 소스), 그라나파다노 치즈 약간, 치즈그라인더(드디어 샀다!), 소금 약간, 올리브 오일 약간
조리 과정은 꽤나 간단하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0. 재료 손질하기
손질된 광어는 키친타월로 앞뒷면의 수분을 제거한 다음 소금, 후추로 충분히 밑간을 한다. 생 바지락은 알이 굵은 것으로 준비해서, 깨끗한 소금물에 담근 뒤 뚜껑을 덮거나 어둡게 해서 15분 정도 방치하여 해감한다.
가지와 애호박은 두께 5mm 정도 반달 모양으로 썰어 두고, 방울토마토는 통째로 사용한다.
레몬은 껍질째 사용하므로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 뜨거운 물에 데쳐 1차로 왁스를 닦아내고, 굵은 소금과 베이킹파우더로 표면을 박박 닦아준다 (반드시 고무장갑을 껴야 한다) 이후 5mm 두께로 썰어준 뒤 씨를 제거한다.
파프리카는 속의 흰 부분과 씨앗을 제거한 다음 적당한 크기로 깍둑썰기 한다.
아스파라거스는 구부러뜨려 보아 딱딱한 밑둥 부분은 잘라내고, 뻣뻣한 아래쪽 부분만 감자칼로 깎아 준다. (이런 과정이 귀찮을 경우 부드러운 윗부분만 잘라서 파는 것으로 구입한다)
양파는 얇게 슬라이스 한다. 감자를 굳이 원한다면.. 껍질을 벗겨 얇게 썰어 둔다.
1. 종이호일 위에 재료 담기
가로 약 45-50cm로 종이호일을 넉넉하게 잘라 2겹 깔아준다. 샐까봐 걱정되면 1겹 더 깔아도 무방하다.
바닥에 감자와 양파를 깔아주고, 그 위에 재워놓은 광어 살을 올려준다. 광어에 약간의 올리브 오일을 둘러준 다음, 주변으로 새우와 조개를 배치한다. 남는 공간에는 방울토마토 및 야채를 둘러 준다. 마지막으로 광어 위에 레몬과 허브를 올려 장식한다. 썰어둔 레몬은 동그랗고 예쁘게 썰린 걸로 1접시당 8-10피스 정도 사용한다.
이 때 종이호일에 적절하게 여백을 남겨 두어야 종이호일 양쪽을 말아주는 작업이 수월해진다.
2. 종이호일 말아 덮기
종이호일 양 끝을 사탕 껍질처럼 말아 우묵한 그릇 모양이 되도록 모양을 잡는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화이트 와인을 넉넉히 붓고, 종이호일 그릇에 종이호일 뚜껑을 만들어 덮어준다.
Remark: 손끝이 야무진 사람들은 종이호일 윗면을 한 장 더 씌운 다음 동그란 파이 모양이 되도록 끝을 접어주는 레시피도 많았지만, 사탕 껍질을 만들어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오븐을 사용할 경우에는 스테이플러로 겉면을 집어 주는 경우도 있으나, 나처럼 전자렌지를 이용할 경우에는 뜻하지 않게 온집안 대폭발 불꽃쇼를 볼 수 있으므로 절대 안 된다!
3. 가열하기
완성된 종이호일 접시를 적당한 크기의 접시로 받친 뒤 전자렌지에 15분 정도 가열한다. (아마 700w 기준이었을 것이다)
4. 먹기! 광어와 채소는 적당히 상큼 심심하니 건강한 맛, 국물은 짭짤 개운한 것이 와인을 부르는 맛. 어버이날 특선이자 건강식임을 빌미로 소스 같은 건 만들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5. 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종이호일은 젖지 않는다, 다만 땀을 흘릴 뿐. 바닥에 깔아놓은 감자 덕인지, 수분이 새어나오는 정도가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자는 역시 굽거나 쪄야 맛있는 재료인가 보다. 오븐에 조리했더라면 이보다는 나았겠지만, 국물 속에서 허우적댄 감자는 정말이지 맛있는 맛이 아니었다. 아스파라거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아스파라거스도 감자도 구워야 제맛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반면에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던 것은 방울토마토였다!
파피요트 맛집을 암만 검색해 봐야 집에서 만든 레시피만 나오고, 결국 파피요트 맛집 따위는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는데, 레스토랑에서 굳이 파피요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만 빼고 이미 다들 집에서 신나게 해먹고 있는 요리였기 때문이다. 유튜버 과나 님이 이야기했듯, 된장찌개 전문점이 없는 것처럼 집집마다 다른 레시피로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혈육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요리를 하니 동생(익명의 너부리)이 옆에서 보조를 하면서 틈틈이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언니도 프로젝트 막바지라 바쁜 가운데에서도 동생이 맛있는 거 한다니 한달음에 날아왔다. 올해의 시작이 쉽지 않았던 만큼, 모두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광어 다음엔 숭어다.
그런데 과연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