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권리가 나를 자유케 하리니
사람에게 인내심이 한정적 자원이라는 것을 몰랐다. 너무 오랫동안 나는, 인내심이라는 것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인내심이라는 소중하고 제한적인 자원을 허투루 낭비하면서 근 30여년간을 살아왔다. 남들도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재미는 없어도 해야 되니까 하(는 척이라도 하)자,
끔찍하지만 맡은 일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척만이라도)하자,
안 하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하라니까 해야지 뭐.
생업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고용주가 헐값에 사들인 나의 소중한 시간과 그에 따른 자유를 허비하면서 희망을 잃어갈수록, 원하지 않는 일들은 빠르게 나의 모든 일과를 점철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에게 있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는 고작 퇴근하고 저녁 뭐 먹을지를 고를 수 있는 정도의 한심한 수준으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통 속에서 나의 내면이 부르짖던 외마디 비명을 외면한 채 질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먹고사니즘은 나의 종교였다. 그 작디작은 월급이라는 열매가 그다지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인지, 하기 싫은 걸 안 해도 되는 환경으로 나를 데려가는 대신, 질질 끌려다니는 쪽을 택한 것은 사실 항상 나의 선택이었다. 돈 그리고 고용중인 상태라는 안정감이 주는 작은 자유마저도 없으면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었다.
스스로를 억누르는 데서 오는 카운터펀치가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푸념을 부르던 무기력은 갈수록 덩치가 커지며 마침내 분노를 불러오기에 이르렀다.
충분히 고질적인 '하기싫어 병' 환자였던 나는 미련함으로 인해 더 큰 병을 자초한 것이었다.
그 이름하여, 안할거야 병.
'안할거야 병'이란, 하기 싫은 일을 안 하기 위해 잔머리를 쓰는 정도를 넘어, 어떻게 하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안해버릴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하기싫어 병'이 원하지 않는 일을 미루거나 불평을 하는 정도의 수동공격성을 띠며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라는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정도라면, '안할거야 병'은 원하지 않는 일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아무런 불편함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데드라인이고 책임이고 인간성이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안할거야! 하고는 적극적이고 일관적인 성실함으로 주어진 일과 크고작은 의무를 거부해 버리는 것이다. 이밖에도 극단적인 '안할거야 병'의 증상으로는 극도의 분노와 함께 '지금 나더러 이런 걸 하라고? 그러는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이건 '뭔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못됐으니 나는 이런 일 따위는 죽었다 깨나도 못 하겠다!' 라는 식으로 직접적인 전투태세에 접어든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예로 이 두 가지 증상을 비교/분석하기 위해 테이블을 그려서 보여주고 싶지만 귀찮아서 하기 싫다고 생각한다면 '하기싫어 병'이지만, 그런 건 독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내가 그림까지 그려 가며 떠먹여 줘야 아는 건가? 그렇게 멍청한 독자들에겐 뭘 해도 안 될 테니 설명은 생략한다! 라는 적극적 합리화로 이어진다면 '안할거야 병'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안할거야 병'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의 의지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것조차도 적극적인 합리화 증상과 함께 뭐든지 안 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려버림으로써 자신의 모든 성장과 발전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 버리는 위험성이다. 결국 원하지 않는 일에 둘러싸인 채 쳇바퀴만 돌면서 한평생을 불평과 한탄에 빠진 채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몰아가는 악순환 속에서 불행함을 자초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권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한동안 튀김칼국수 컵라면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튀김칼국수를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밤마다 집 앞 편의점을 지날 때면 튀김칼국수가 아른거려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매일 밤 튀김가루가 두둑히 들어있는 컵라면을 먹는다면 나의 앞날은 뻔했다.
결국 눈 딱 감고 새로운 접근방식을 택했다. 튀김칼국수에 대한 명제를 바꾸어 먹고 싶지만 억지로 참는 대상이 아니라, 매일 밤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로 바꾸었다. 퇴근길에 나는 무조건 집 앞 편의점에 들러서 튀김칼국수를 먹지 않고는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만들었다. 3일 연속으로 편의점에 앉아 튀김칼국수를 먹던 밤, 입안 가득히 배어나는 튀김가루의 기름진 맛과 꼬들꼬들한 면 그리고 짭짤한 라면스프의 조화가 선사하는 것은 환희도 아니었고 살이 찌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맛없음과 분노'였다. 세상에 천지인 맛난 것들을 두고 왜 내가 밤마다 고작 이런 걸 먹고 있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화가 날 지경이었고, 그 날 이후로 튀김칼국수를 죽을 때까지 입에 대지도 않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하게 되었으며 이를 아주 잘 실천하고 있다.
하기 싫음, 혹은 이를 넘어선 안해버리겠다는 분노는 결국 의무감과 인내에 지친 내가 보내는 신호가 아닐까.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억누르는게 아니라 억지로 먹어야 하는 상황에 두니 질려서 먹고 싶지 않게 된 것처럼,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안 해도 될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어야 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일 일이라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고, 마음의 짐을 덜어낼 때에 비로소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힘이 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적절한 이유를 찾아서) 안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함으로써 외부의 부적절한 요구사항과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고, 무언가를 억지로 참아내면서 어떻게든 해내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그만두어야 한다. 결국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들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무와 강제적 상황에 떠밀려 무언가를 해야 했던 것이고, 이것들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마저 할 수 없도록 나를 묶어버렸던 가시덤불이 되었던 것이다.
쓸데 없는 데에는 신경을 끄고, 정말 고통스럽게 하기 싫은 건 대충 하거나, 못하겠다고 하거나, 그냥 하지 말자.
하기 싫은 걸 안 하겠다고 분노와 역정을 내면서 에너지를 써야 하다니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잘할 수 있을지만 생각하기에도 모자란 것이 삶이다.
진정으로 화를 내야 할 것은 허투루 쓴 에너지의 낭비로 진짜 원했던 것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의무감이 당신을 좀먹게 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선택할 수 있을 자유를 주자.
하기 싫은 것들 몇 가지는 얼렁뚱땅 하면서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노력 여하를 떠나 어쨌든 당신도 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