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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오소리 Oct 31. 2023

FBI WARNING: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커리어 에세이 (4) 퇴사하고 싶은 날의 오후

산업군 내 '업력 150년의 글로벌 리딩컴퍼니'를 호소하는 2인 체제의 어느 작은 외국계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대뜸 대표로부터 신규 비즈니스를 담당해 보라며 1주일 정도 유럽 본사에 가서 연수를 다녀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드디어 인정받았구나,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하면서 신이 나서 출장을 떠나, 내가 맡게 될 비즈니스 관련 부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왔었다. 해당 부서 연구소장에게 들어보니, (한국에 왔을 때 노래방에서 일본 아이돌 노래를 불러가며 잘 놀아드렸던) APAC의 어느 높으신 양반이 '한국에 유능한 인재가 있다'며 그 포지션에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매우 좋았다. 말로만 듣던 Admin으로 시작했지만 승승장구하는 인물의 좌충우돌 서사가 여기서부터 시작되겠구나 싶어 설레기도 했었다. 하지만...


출장을 다녀온 지 두어 달도 안 되어, 해당 부서의 Head부터 10명 가까이 되는 부서의 모든 사람이 줄퇴사하는 것을 보자 위기의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본사 담당자는 물론, APAC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인원들마저 줄줄이 퇴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애초에 이 신사업의 구조는 마른 수건을 쥐어짜야 하는 불가능한 BM이었기 때문이다. B2G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가 정부기관의 보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지 온라인으로 안전진단을 해서 엔지니어를 급파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질 않나, 200억 300억씩 하는 거대한 장비를 팔면서 고객사의 세부 부품 관련 요청은 쳐다도 안 보던 건 언제고, 사제 부품의 시장이 형성되고 난 이후에야 상황이 안 좋아지니 잔잔바리 부품 장사를 시키지를 않나,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그 와중에 월간 미팅을 할 때마다 고객사별 분석을 해 오라는데, 이런 분석은 컨설턴트가 할 수 있는 레벨이지 유튜브나 인터넷을 뒤져서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한테 뭘 배우겠나? 관련 업무 담당자들이 싹 다 퇴사했는데! 딱 하나 남은 유럽 본사 직원이랑 둘이 미팅을 하는데 나는 아는 것도 할 말도 하나도 없고, 정말 이게 뭔가 싶은 상황이었다.


거기까지도 참을 수 있었다. 좋건 싫건 매월 돌아오는 그 미팅만 어떻게든 버티면 되고, SFDC 리포트야 정해진 양식에 맞춰 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더 참기 힘든 것은 상사의 태도였다. 애초에 저 신사업을 나에게 준 것 자체가, 본인이 하기 싫은 '안 될 장사'를 나에게 떠넘기는 것임을 공공연하게 말해 오던 그였다. 불행하게도 나의 상사 역시,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의 일의 경중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하는 분이었다. 2인 체제에서 업무가 돌아갈 수 있도록 단순업무 뿐만 아니라 온갖 보고서와 번역을 담당하고 비딩 업무를 다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준에서 '돈도 못 벌어 오는' 나의 일은 '높으신 양반이자 바쁘신 몸인 본인이 하기에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하찮으니 '나 대신 너나 해야 하는' 잡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나는 3개국어를 쓰면서 오만 일을 다 하는데 돈은 본인이 다 가져가고.... 그의 연말정산 서류를 볼 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급기야는 억울함이 터진 어느 날 연봉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는데, 그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원래 월급은 일하는 만큼 주는 게 아니라 먹고 살 만큼 주는 거야."


이것이 바로 강남좌파의 사상을 함축한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온갖 정치 이야기에 시달렸기 때문에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이 사람은 본인을 뭘로 생각하며 나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 와중에, 정말로 대단한 일이 터졌다. PDF 문서가 안 열린다며, 상사가 나에게 노트북을 봐 달라고 해서 그의 노트북에서 설정을 바꾸려던 참이었다. 그 때, 화면 오른쪽 구석에서 연두색 팝업창이 떴다 스르르 사라졌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Torrent download completed: Tokyo_Sexy_Hot_1234.avi"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래, 저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설마- 하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뒤, 상사가 먼저 퇴근한 어느 날이었다. 그의 자리에서 뭔가를 찾아야 해서 그의 책상으로 갔던 나는 또다시 엄청난 것을 보았다. 이번엔 도저히 내 눈을 의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5x6열로 탐색기 화면에 떠 있는 파일들의 썸네일이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FBI WARNING" 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회사에서 열심히 야구동영상을 다운받아 본인 외장하드에 옮겨담고 그대로 자리를 뜬 것이었다. 여직원과 단둘이 앉아 있는 사무실에서 업무시간에 저런 걸 다운받고 앉아 있다고? 이건 그가 야구동영상을 회사에서 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하지만 둘이 앉아있는 회사에서, 인사권을 가진 상사와 일하는 내가 본사에 이걸 신고했다가는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 자명하다 보니, 이 억울함에 날마다 속을 끓일 뿐이었다.


혼자서 점심을 먹어야 했던 어느 날, 파스타 집 아르바이트생이 나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는 것을 보고 퇴사를 결심했다. 망해가는 신사업, 상사의 막말 그리고 FBI Warning이 상사의 바탕화면에 떠다니는 미친 3단콤보를 맞고 이성과 제정신을 잃은 나는 A4용지 4장 반에 써내려간 인수인계서만 내던지고 4년 반만에 퇴사하고 말았다. 대책 없는 퇴사였다 보니 1년 가까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지금까지도 그때 퇴사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한시라도 더 빨리 퇴사하지 않았음을 후회할 뿐이다.


(퇴사시리즈 2탄은 정말 매운 맛이라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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