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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노동자 출신 사회철학자의 이야기

<에릭 호퍼, 거리의 철학자>

by 오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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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릭 호퍼(1902-1983)라는 인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길거리의 노동자, 부두 노동자 출신의 유명한 이 철학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본의 전 <마이니치방송> 기자인 니시무라 히데키씨가 쓴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논형, 2020)을 통해서다.




이 책은 일본의 '3대 소요 사건'의 하나인 스이타 사건(1952년 6월) 발생 50년을 앞두고 이 사건의 배경과 진상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건의 주역 중의 한 명인 미키 쇼고의 행적을 찾는 과정에서, "항만 노동자로 일하다가 훗날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정치학을 강의한 사회철학자"인 에릭 호퍼라는 이름이 나온다. 저자는 미키 쇼고의 절친한 친구로 오사카의 빈민가인 가마가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히라이 쇼지를 만나 얘기를 들으면서, 그를 '일본의 에릭 호퍼'인 듯하다고 평가했다.




나는 책을 읽던 도중에 에릭 호퍼가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평소 이용하던 인터넷서점을 찾아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이다미디어, 2003, 에릭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를 주문했다. 그 사이트에는 새 책은 품절이고 중고밖에 없어 할 수 없이 중고책를 샀다.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이렇게 한 책을 읽다가 다른 책을 소개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이 또 다른 책을 이어주는 독서, 즉 '사슬 독서'인 셈이다. 좀 다른 얘기이지만 사람들의 독서법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내가 접한 독서법 중에서 가장 특이한 방식이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이다. 그는 자신이 흠모하는 작가가 숨지면 그에 대한 조의로 그가 쓴 모든 책을 구해 완독한다고 한다. 숨진 사람의 저작을 다 읽으면서 조의를 표하는 것이니 '조의 독서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독서를 하면 그 사람의 전 인생을 거의 완벽하게 반추하게 될 터이니 가장 훌륭한 조의라고도 할 수 있다.




에릭 호퍼의 자서전인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는, 그가 펴낸 11권 책 중에서 유일하게 사후에 출판된 책이다. 원제는 <Truth Imagined>다. 이 책은 길거리의 노동자,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순전히 독학으로 저명한 철학자가 된 그가 떠돌이 노동자 생활을 끝내고 40살 때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로 정주할 때까지 그의 반생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잡역부, 웨이터 보조, 사금 채취공, 목화 따기 일군 등을 전전하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27개의 장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단순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 구약성서, 몽테뉴 등에 탐닉했고, 번 돈이 있으면 먹는 것보다 도서관에 찾아가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키웠다. 어느 날 레몬나무의 백화현상의 원인을 밝히려고 고민하는 식물학자 스털턴 박사를 도서관에 만나, 자신이 독서를 통해 얻을 아이디어를 제공해 백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기도 했다.




나는 그가 떠돌이는 개척자와 유사하다는 말한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금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 대열에 합류해 줄을 설 것 같은 타입의 사람들이 이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개척자의 다수를 이뤘을 것이다. 그것을 새로운 나라들을 세울 때에도 거의 예외 없이 그랬을 것이다."(75페이지)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에 그런 친족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76페이지)




그는 자신을 개척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기꺼이 즐기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가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부두 노동자로 정착한 계기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폭격으로 시작한 태평양전쟁 때문이었다. 이후 25년을 샌프란시스코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했다. 부두 노동자를 하면서 이스라엘 문제와 흑인 문제, 학생운동, 베트남전쟁 등 당대를 풍미했던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도 하고 저술도 하며, 미국에 에릭 호퍼 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글쓰기 철학은 어떤 어려운 문제도 200자 정도면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아포리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많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검색을 해보니, 비록 한국에 늦게 소개 됐지만, <맹신자들(The True Beliver)>을 비롯한 그의 주요 저서 대부분이 번역 출판돼 있었다. 길거리 철학자로서 그의 본격적인 사상을 탐색해보려는 사람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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