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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려진 신화, '아쿠타가와상'

by 오태규
재일동포 대표 시인 김시종씨

우리나라에 잘못 알려진 신화가 있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이라 불리는 '아쿠타가와상'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재일동포가 이 상을 타면, 노벨문학상이나 거머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출판사에서도 일본 번역 소설의 판매량을 늘리려는 의도로 <아쿠타가와수상작>을 표지에 크게 박아 내놓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일본특파원을 지내고 일본에 관해서 두루 안다고 생각한 편이지만, 그동안 이런 신화와 오해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이런 신화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재일시인 김시종씨와 비판적인 지식인 사다카 마코토의 대담집 <'재일'을 산다>(집영사신서, 2018년)을 읽으면서다.


이 책에서 김시종 시인은 아쿠타가와상과 관련한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1935년 아쿠다카와상을 처음 제정한 사람은 일본의 종합문예지 <문예춘추>를 창립한 기쿠치 히로시(1888-1948)다. 그런데 작가이면서 저널리스트였던 기쿠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종군기자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문예총후운동을 주도했다. 기쿠치는 패전 뒤 전쟁협력을 한 전력 때문에 공직에서 추방되고 <문예춘추>도 해산된다. 하지만 문예춘추사에 '신'자를 더해 문예춘추신사를 회사 이름을 바꿔 출판사를 유지하고, 뒤에 다시 문예춘추로 복귀했다.


중요한 것은 기쿠치 히로시와 아쿠타가와상이 우리나라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냐 하는 점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다음해부터 조선에서 우리말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한글문학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어문학, 즉 '황도문학'을 진흥시킨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 조선총독부문학상이다.


구체적으로 '국어(일본어)문예총독상'(상금 1천만엔, 지금이라면 집을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 창설된 것은 1943년 1월이다. 하지만 이 상은 1938년 팔굉일우의 황도정신에 입각한 예술을 표창하기 위해 만든 '조선예술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기쿠치가 이 상의 상금을 제공했고, 이런 배경에서 문학 부문의 심사를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회에 일임했다는 게 김 시인의 설명이다. 또 제1회 국어문예총독상을 수상한 사람이 한 때 일본에서 프로레타리아문학으로 필명을 날리다가 친일문학가로 전향한 김용제다. 이런 사실을 보면, 기쿠치 히로시-아쿠타가와상-친일문학-한글문학 파괴의 연쇄를 알 수 있다. 김용제의 수상작은 대동아공영권의 성업을 찬미한 <아세아시집>이었다.


나는 김 시인의 이 글을 읽으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아쿠타가와상을 마치 일본의 노벨문학상것처럼 생각하고 부지불식간에 이 상과 관련한 기사를 써왔기 때문이다.


1년에 상반기, 하반기로 나눠 두 차례 수상자를 뽑는 아쿠타가와상은 2021년 상반기까지 모두 165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제까지 32번이 수상자가 없었으니, 실제 수상자는 133명이다. 이 중 재일동포 수상자는 모두 4명이었다. 1971년 이회성이 <다듬질하는 여인>으로, 1988년 이양지가 <유희>로, 1996년 유미리가 <가족 시네마>로, 1999년 현월이 <그들의 집>으로 상을 탔다.


그들이 일본에서 최고 권위 있는 상을 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 상이 어떤 배경과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연구자들도 이런 문제를 더욱 깊게 연구해, 많은 사람을 무지의 늪에서 구하는 데 공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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