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21년 10월호 기고문
내년 3월의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즘, “교양 없다”는 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어떤 ‘초 엘리트’ 야당 후보의 눈살 찌푸리게 하는 언행 때문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면, 교양 수준이 적어도 일반시민이 지니고 있는 평균치보다는 나아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사람에 대해 “교양 없다”라고 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판단한다. 하나는 합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 여부고, 또 하나는 몸가짐이 천박하냐 아니냐다. 우리는 보통 두 가지 기준을 모두 통과한 사람에게 “교양 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지식은 있는데 행동이 천박하거나, 행동은 품위 있어 보이지만 머리에 든 것이 없을 때 “교양 없다”고 말한다. 물론 지식과 행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따로 노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지식도 얇고 행동도 천박한 사람에겐 “최악”이라는 평점이 따른다.
먼저 쉽게 판별할 수 기준은 눈에 잘 드러나는 행동거지일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최고 명문대학교, 그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수재들의 집합소라는 법대를 졸업하고, 8전9기라는 불굴의 도전 끝에 한국에서 가장 힘든 출세 관문으로 꼽히는 사법고시를 통과해 검찰 수장까지 지낸, ‘엘리트의 화신’이라 할 만한 어떤 후보의 몸가짐을 먼저 살펴보자.
출마선언을 한 첫 기자회견 때부터 머리를 수백 번이나 좌우로 흔들어대는 바람에 보는 사람들이 메시지에 집중하지 못했다든가 어느 자리에서든 양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모습에서 엘리트로서 품위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리를 이끌고 싸움터에 나가는 고릴라의 우두머리처럼 건들건들 걸어가는 모습에서 마피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면, 나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상습적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것은 그가 한 번도 ‘서민의 발’인 지하철을 타보지도 않았다는 반증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고, 상체를 뒤로 제킨 채 앉는 습관은 겸손을 요하는 자리에서 한 번도 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행동은 천박하지만 속마음은 꽉 찬 사람도 있다. 그래서 행동거지만 보고 한 사람을 전면적으로 긍정 또는 부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인식은 어떠한지 보자.
그가 때때로 드러내고 있는 사회 인식은 ‘설화’라고 부르기에도 모자랄 지경이다. ‘무교양의 극치’라고 말하는 게 적절하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실시를 비판하면서 ‘주 200시간’이라도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거나 손발 노동은 지금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한국의 노동 현실을 전혀 모른다고 자백하는 것에 다름없다. 한국의 노동 상황은 몇 년 전만 해도 세계 최장 노동시간에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듣기 일쑤였고, 고용 불안에 내몰린 많은 노동자들은 지금도 생명의 위험과 비정규직 차별을 감수하면서 손발 노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심각한 것은 ‘손발’이란 접두어와 관계없이 노동 자체를 경시하는 반노동적 인식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인간의 노동 없이 세상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신자유주의 성향의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의 책을 들먹이며, 저소득층에게는 불량식품이라도 먹게 해야 한다는 인식을 보인 것은 더욱 참담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권 출범 초인 2013년 봄에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범과 함께 불량식품을 ‘4대 사회 악’으로 규정하고 그의 척결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세운 적이 있다. 이런 사실만 봐도 그의 인식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수준 미달의 언행은 그의 인문학적 교양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의 인문학에 대한 인식은 말문이 막힐 정도다. 그는 9월 13일 안동대학 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학, 자연과학 분야가 취업하기 좋고 일자리를 찾는 데 굉장히 필요하다. 지금 세상에서 인문학은, 그런 거(공학·자연과학) 공부하면서 병행해도 된다. 그렇게 많은 학생을 대학 4년과 대학원 4년, 그건(인문학 전공 학생은) 소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의 ‘인’자도 모르고, 고민해 보지도 않은 ‘천박함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인생에서 교양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그의 말과 정반대로 하는 게 맞다. 인문학은 어떤 특별한 학문을 하는 사람이 ‘곁가지’로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학문하는 모든 사람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소양이다. 거의 모든 대학이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을 이수하게 한 뒤에야 전공과목을 이수하도록 커리큘럼을 짜고 있는 것도, 인문학을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보고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은 배우지 않아도 되는 ‘잉여 학문’이나 멋을 부리기 위해 동원되는 ‘사치품 학문’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배우는 필수 기초학문이다. 인문학 경시는, 목적보다 수단을 중시하고 인간을 생각하기보다 목전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식기술자를 양산하는 풍조를 조장하기 쉽다. 일본의 ‘학문의 천황’으로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학계는 전문 분야 별로 분절돼 있는 ‘문어 항아리’ 형 사회여서 학계 상호간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반면 서구 사회는 교양이 부채의 손바닥처럼 공통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부챗살’ 형 사회여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언제 만나도 대화와 소통이 잘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어떤 형의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는 마루야마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명확하다.
그러면 왜 우리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자부하는 법대 출신 대선 후보들이 유독 ‘반인문학’, ‘무교양’의 대표주자로 거론될까. 개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머리 좋은 사람을 입학시켜 반교양적인 ‘괴물’로 키워내는 교육계와 법조계 등 우리 사회 엘리트 교육 및 생산 구조의 결함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가 가장 많이 모여 있다고 하는 판사, 검사의 세계를 그곳 출신 사람들의 얘기를 토대로 한 번 살펴보자. 우선 검사와 판사가 되려면 학창 시절에 한 눈 팔지 않고 ‘닥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프로축구 케이리그의 최강희 감독이 ‘닥치고 공격’이라고 하는 ‘닥공’ 전술로 유명했지만, 여기서 ‘닥공’은 닥치고 공격이 아니라 ‘닥치고 공부’를 뜻한다. 공부도 인문학을 비롯한 교양 과목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법 기술 관련한 공부만 닥치고 해야 겨우 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 나도 학창 시절, 고시 공부를 하는 동료들이 학과 과목 시간엔 들어오지도 않고 도서관에 하루 종일 파묻혀 법전만 펴고 있는 것 자주 목격했다. 시험공부 하느라 교양 쌓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고시에 합격한 뒤엔 교양서적을 읽으며 그동안 채우지 못한 마음의 양식을 보충할 것 같지만, 그때부터는 떠밀려오는 일에 치이고 출세지상주의에 빠져 그런 데 눈 돌릴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각성한 사람이 아닌 한, 교양 수준이 고등학교 졸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가 가장 어려운 대학의 입학시험, 가장 어려운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만 내세우며 모든 면에서 영원히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한다. 이들의 착각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엔 유지될 수 있다. 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외부와 격리된 채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한 언론인 선배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해 준 적이 있다. “법조계를 취재할 때 법 논리로 접근하면 그들을 당할 수 없다. 진실은 부분의 시각이 아니라 총체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드러난다.” 여기서 그 선배가 말한 ‘총체적인 시각’은 바로 교양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적’과 ‘출세’만을 유일의 인생 목표로 달려온 그들은 구조적으로 총체적 시각, 즉 교양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굴레 속에 있다. 그 굴레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은 다양한 군상이 복잡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전혀 ‘딴 세상’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게 된다. 이와 함께 그들의 무교양도 자연스럽게 폭로된다.
이때 바로 그 원인이 자신의 ‘교양 없음’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교양 키우기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교양 키우기는 콩나물 기르듯이 ‘속성 재배’할 수도 없고, 밤샘공부 몇 시간 만에 에이(A) 학점 따듯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양은 오랜 시간 꾸준히 숙성시키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어릴 때부터 전인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교육 토대를 갖추는 것이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중심의 현행 교육제도를 지·덕·체가 골고루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
일본제국주의 시대 해군 사관을 길러냈던 일본의 해군병학교(우리의 해군사관학교에 해당) 졸업생에게는 졸업 성적순에 따라 이른바 ‘한모쿠 넘버’가 부여됐다. 이 서열이 군 생활 내내 따라다니며 승진과 출세는 물론이고, 심지어 어떤 배에 누가 탈 것인지까지 결정했다. 일본의 일부 군사 전문가는 전략전술 운용 능력이 아니라 졸업 성적에 모든 것이 좌우되는 일본 해군의 이런 관행이 일본의 2차대전 패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런 관행이 과연 남의 나라만의 일일까. 우리 사회에서도 법조계를 비롯한 엘리트 집단에서 지금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위험이 닥치기 전에 이런 관행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우리 사회도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의 대선 출마로 우리 사회가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그들의 ‘교양 없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교양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또 교양을 키우기 위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과제도 제시해 줬다고 본다. 김대중 대통령은 숨지기 약 두 달 전에 열린 6.15선언 9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민주화를 위해 거창하게 할 것이 없으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나는 독서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인문 교양서 한 권이라도 정성껏 읽는 것이, 이 사회의 무교양 퇴치를 위해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글판 10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