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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Aug 18. 2022

미국 정치만 '협잡과 음모'가 판칠까-하우스오프카드

미국 드라마, 정치의 추악한 이면

7월 중순부터 1달여 동안 넷플릭스에서 미국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프 카드> 전편을 봤다. 1부에서 6부까지로 돼 있는데 1부에서 5부까지는 각각 13편씩이고, 마지막 6부는 8편으로 끝난다. 총 6부 73편의 대하 드라마다.


계산해 보니, 하루에 2편 이상을 본 셈이다. 한 편이 대략 50분 정도 분량이니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꼬박 이 드라마를 보는 데 쏟아넣었다. 아마 정규적으로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마침 집에서 자유시간을 즐기고 있는 터여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영화나 드라마 보기를 즐겨 보지 않는다. 아직 영상보다는 책이 익숙한 구세대라면 구세대다. 하지만 근자에 넷플릭스에 취미를 붙이면서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영화나 드라마가 종합예술이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책을 보는 것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더욱 생생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영상의 단점은 책보다 쉽게 기억이 날라간다는 점이 아닐까.


 나는 또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면이 있다.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끝이 보일 때까지 가는 성격이다.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중간중간 발췌해서 보면 성이 차지 않는다.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해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야 속이 시원하다. 내가 매 편 약 50분 분량의 드라마 73편을 모두 시청할 수 있었던 것도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성격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하우스 오프 카드>는 미국 정치의 추한 면을 다루는 드라마다. 출세를 하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파고 협박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다. 주인공인 프랜시스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 분)은 마치 마키야벨리가 환생한 듯한 인물이다. 권력욕으로 치면 그의 부인 클레어(로빈 라이트 분)도 그에 못지 않다. 거짓말과 능청떨기, 면종복배, 뒷통수 치기는 귀여운 잡기  수준이고, 심지어 날조와 조작, 살인까지 버젓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이 드라마 속에서 중국 고래의 싸움 비법인 36계의 모든 기술을 다 볼 수 있다.


아무리 '네가 살면 내가 죽는다'라고 하는 험한 정치의 세계라 해도 설마 이 정도까지야 하는 장면도 꽤 있지만, 그를 통해 권력 투쟁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장점이다. 정치가 순수하게 가치와 이념을 놓고 선의로 경쟁하는 '증류수 세계'가 아니라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때로는 손발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 구정물을 밟고 다녀야 하는 '탁류 세상'임을 보여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주인공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를 만나 실제 현실 정치는 드라마보다 더욱 추잡하다고 말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 드라마가 미국 정치의 이면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내용이야 각자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나에게는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먼저 백악관과 의회 등을 취재하는 미국 기자들의 모습이다. 조이 반스처럼 특종을 위해 몸도 바치며 특정 정치인과 유착하지만 끝내 살인을 당하는 부패한 기자가 있는 반면에, 하나하나 사실을 꼼꼼히 추적하고 확인하면서 본질에 다가서는 과정에서 살해 당하는 해머슈머트 같은 정의파 기자도 있다. 반스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취재를 하던 중 수감과 암살 미수, 자살로 생을 마친 루카스, 권력의 뜨거운 맛에 데서 낙향했다가 다시 거대 재벌의 암부를 파헤치려고 힘쓰는 제닌 스콜스키는 반스와 해머슈머트의 중간 어디 지점에 있는 기자들이다. 또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을 향해 거침없이 곤란한 질문을 날리는 기자들의 모습도 신선했다. 한국의 기자들도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비춰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는 드라마 중간 곳곳에 나오는 강대국 정치다. 이 드라마에는 푸틴을 연상하는 러시아 대통령으로 페트로프가 나온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미-러 양국의 지도자들은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내며 거래를 한다. 예를 들어 중동 문제를 대하는 것만 봐도, 평화나 정의가 아니라 각국 기업의 이해관계, 자신들의 국내 정치적 입지가 우선된다. 그 가운데서 피 터지고 당하는 사람들은 중동지역에 사는 민중들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식으로 강대국 정치가 진행될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작은 나라의 시민으로서 끔직하기 그지없다. 근대 이후 항상 미-중-일-러의 강대국 정치에 휘둘려온 한국의 처지를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봤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의 배후에도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강대국 정치 내지 국내 정치적 이해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이 생긴 것도 그의 대만 방문이 이 영화를 보는 와중에 벌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표면의 권력자와 배후의 권력자가 다르다는 점도 보여준다. 백악관과 의회는 연극무대에 불과하고, 항상 그 뒤에는 자신의 이해에 맞게 전면의 배우들을 조종하고 무대를 연출하는 실세, 즉 재벌과 기득권 세력이 있다. 이들은 항상 저택의 파티, 별장의 모임, 밀실 회합을 통해 주판알을 튕기며 정치에 개입한다.   


물론 <하우스 오프 카드>가 미국 정치, 아니 현실 정치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정적이고 추악한 모습을 확대해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정치의 빼놓을 수 없는 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 보기를 모두 마치면서,  아무리 선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정치의 이런 추악한 모습을 간파하지 못하거나 외면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는 고상한 철학이나 신학을 논하는 신선놀음의 세계가 아니라 악인들이 펄펄 날뛰는 뒷골목 세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이 드라마가 너무 강렬하게 보여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이런 서양 속담이 떠올랐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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