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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Sep 07. 2022

한국현대사의 천적, 박정희와 김대중의 가상대화

유신, 김대중 납치, 월남파병, 경부고속도로, 10.26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 인물 중에서 천적(라이벌)을 꼽는다면 가장 먼저 이승만과 김구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남과 북을 함께 사정권에 넣으면 박정희와 김일성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남쪽의 정치인으로는 14대, 15대 대통령을 연달아 지낸 김영삼과 김대중을 빼놓을 수 없다. 김영삼이 '감과 행동력'의 정치인이었다면 김대중은 '지와 통찰력'의 정치인이었다. 김영삼-김대중 이른바 '양김'은 정치인생의 고비고비에서 경쟁과 협력을 하면서 현대 정치사에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양김을 비교하는 글은 꽤 많은 편이다.


양김의 존재는 박정희라는 대항마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양김의 진정한 천적은 박정희였다. 하지만 김영삼은 1990년 긴 야당생활을 접고 3당 합당을 통해 '박정희 진영'에 합류했다.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박정희의 천적에서 탈락했고 김대중만 그의 유일한 천적으로 남게 됐다. 더구나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후보로 나서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래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줄곧 그의 '제거 대상 1호'였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의미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진정한 천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질긴 인연 치고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 1967년 치열했던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된 뒤 1968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5분 정도 의례적인 환담을 나눈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둘은 박정희가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점점 강도를 더하가면서 대결하는 사이가 됐다.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항상 상대를 의식하며 치열하게 간접 대화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점선'으로 이뤄진 대화를 두 사람이 남긴 기록을 통해 '실선'으로 복원한 가상 대화집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우리들의 자화상>(논형, 유상영 지음, 2022년 9월)이 나왔다. 박정희와 김대중 전문 연구자인 유상영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아니었으면 나오기 힘든 책이다. 유 교수는 포항제철의 성공 요인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이래 박정희 연구를 계속해왔고,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을 지내며 김대중 관련 기록을 샅샅이 섭렵하며 김대중 연구를 해왔다.


나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일본에서 망명객으로 살다가 2021년 2월 숨진 정경모씨의 책 <찢겨진 산하>가 떠올랐다. 한국 근대사에서 세 명의 순교자인 여운형, 김구, 장준하가 저승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가상 정담 형식의 책인데, 정경모씨가 그들의 생전 언행과 저서를 참고해 해방 이후의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유 교수의 책은 저자가 박정희와 김대중의 양자토론 사회를 보는 형식을 취한 점이 다르다. 하지만 두 책 모두 등장인물의 전모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내공 깊은 책이다. 대화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책이 술술 읽히는 것은 덤이다.


이 책은 모두 3부와 에필로그1(청년과의 대화: 박정희와 김대중이 말하는 청년), 에필로그 2(박정희와 김대중 연보)로 구성돼 있다. 제1부(인간적 대화: 나는 누구인가)는 음식으로 치면, 전채(에피타이저)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과 어머니, 일제 식민지 등등 개인사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제2부(철학적 대화: 사회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제3부(역사적 대화: 박정희와 김대중이 얽혀 살아온 역사 현장들)가 주요리(메인)다. 2부에서는 역사, 경제성장, 민주주의, 지역감정과 색깔 논장, 외교전략, 민족과 민족주의, 민족분단과 통일에 관련한 두 사람의 인식과 관점, 생각을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전반적인 철학에서 박정희가 엘리트주의와 위로부터 강제 주입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데 비해, 김대중은 민중 중심의 사고와 과정 중심의 사고가 두드러진다. 또 유교문화와 한의 정서에 관해 박정희가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데 비해, 김대중은 그 속에서 긍정성과 발전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외교전략에서는 박정희가 자주를 유난히 강조하고 김대중이 국제협력에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두는 점이 눈에 띈다.


1부에서 사회자(저자)가 두 사람을 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불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물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중략> 앞으로 두 분의 대화에서 이 같은 기질의 차이가 역력히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2부와 3부는 그 예고대로 전개된다.


3부는 두 사람이 서로 얽혔던 역사 현장을 중심으로 생각과 기질의 차이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전쟁,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4.19와 5.16, 한일회담, 월남파병 등 초기 국면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더욱 많아 보인다. "정치는 시궁창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 것"이라는 김대중의 현실적인 정치관이 많이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김대중은 장면 정부를 제외하고는 '총론 찬성-각론 반대 내지 보완'의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가 독재권력을 강화해가면서 둘 사이의 간격은 점차 크게 벌어진다. 삼선개헌과 유신이 가장 대표적이다. 박정희는 가난 탈피와 북한과 대결에서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김대중은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영구집을 위한 욕심이라고 공박한다. 그 둘 사이에 최대의 인식차이가 드러나는 곳이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이 책의 가장 미덕은 저자의 말대로 "독자들이 역사적 현장에 더 쉽고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한 것이라고 본다. 또 각자 자기만의 얘기를 해온 두 사람을 가상 현실 속에서나마 대화하도록 함으로써 두 사람을 각기 지지하는 세력에게 이해와 화해, 곰감의 기회를 제공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은 긴급조치,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박동선게이트, 부마항쟁 등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부분이 많이 누락된 점이다. 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주도적으로 얽혀 부딪히고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고받은 말들이 있는 사건이나 현장만 다루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그런 점을 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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