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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Sep 05. 2022

'유비는 선, 조조는 악'이라는 도식에서 깨어나다.

드라마 <삼국지> 95편, 시청 소감

미국의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프 카드> 6부작(73편)을 다 본 뒤, 중국 드라마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넷플릭스를 검색해 보니 총 95편짜리 중국 본토판 <삼국지>가 버티고 있었다.


몇 달 전 코로나에 걸려 집에서 요양을 하면서 이문열 편역 <삼국지> 10권짜리를 통독한 뒤여서, 본토판 드라마 <삼국지>는 과연 책과 어떻게 다뤘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더구나 요즘은 정규적으로 하는 일이 없는 터여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장편 대하 드라마에 도전할 적기라 할 만했다.


8월 18일 첫 편부터 시작해 9월 5일 마침내 전편 시청을 끝냈다. 19일 만에 95편을 돌파했으니 하루에 5편 정도씩 본 셈이다. 대략 한 편에 45분씩인데 중간부터는 어차피 중국어를 모르니까 1.5배속에 맞추어 봤다. 그래도 하루에 세 시간 정도를 투여했다. 아마 정규적으로 하는 일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강행군이었을 것이다.


중국 배우들은 낯이 설어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를 뿐더러 나로서는 누가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가릴 눈도 없다. 다만 이 드라마를 쭉 보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우선 유비와 관우, 장비 삼형제에 대한 막연한 애정을 떨쳐버리게 됐다. 어릴 적부터 삼국지 얘기를 듣고 책을 읽으면서 '유비는 선, 조조는 악', '제갈량은 선, 사마의는 악'이라는 생각에 부지불식간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번에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유비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고 모략보다는 인의를 강조하는 덕장이지만, 천하 지배를 꾀할 지도자감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제갈량(공명)의 조언을 무시하고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오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제갈량은 위, 촉, 오 삼분 천하에서 천하 통일을 위해서는 오나라와 손을 잡고 강적인 위를 공격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는데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이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자기의 공을 세우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걸핏하면 '각기 다른 때에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한 날 한 시에 죽겠다'는 도원결의를 앞세우며 감정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이런 사적인 형제애는 조직의 크기가 작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공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사적으로 처리해온 관성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통해 본격적인 삼분천하를 이뤘을 때, 유비의 대응이 바로 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처리한 좋은 사례다. 천하대세를 읽지 못하고 오나라 공격에 숨진 관우, 장비의 복수전에 나섬으로써 그동안 닦아온 촉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기도 그 홧병으로 죽고 만다. 꼭 나라 일이 아니더라도 조직을 이끌어 갈 지도자라면 반드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훈이라고 본다. '공적인 일을 사적 인연과 감정으로 처리하지 마라.'


95편 중 마지막 몇 편은 당대의 지략가인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부분이 이 드라마의 백미다. 촉과 위의 거장의 대결은 결국은 무승부로 끝나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 지략 대결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 둘의 대결은 전쟁(국가경영)이 단지 전략과 용맹뿐 아니라 경제 상황, 상대의 심리와 자연현상까지 총체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종합예술임을 보여준다. 요즘 용어로 하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결합으로 이뤄진 융합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금 반도체가 잘 나가니까 대학에 반도체학과를 증설하라거나 인문학은 대학 4년 동안 배울 필요가 없다는 식의 수준 낮은 인식을 가진 지도자로서는 위기의 국가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삼국지 각 장면을 극화의 특성에 맞게 크게 생략하거나 부각했다. 삼국지 전체에서 오나라의 비중이 원래부터 유비의 촉나라와 조조의 위나라에 비해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유비와 조조,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을 더욱 부각하고 강조하려고 한 나머지 책보다 훨씬 더 오나라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었다. 또 책에서는 공명이 맹획을 7번 잡았다가 풀어주면서 남만을 수복하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정비 작업으로 잠깐 스치는 정도로 나온다. 또 드라마의 극적 요소를 살리려고 한 듯 미녀의 등장 장면이 책보다 크게 부각된 게 눈에 띄었다. 초반부에는 동탁과 여포를 이간시키는 인물인 초선이 부각됐고, 후반부에는 조비가 사마의를 감시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하사한 정주가 초선과 대를 이루는 인물로 나왔다.


역시 같은 내용이라도 책과 드라마는 속성상 강조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드라마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장면이 중요하지만, 책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도 드라마보다 책에 익숙한 세대라 그런지, 나는 드라마 속의 인물이 책을 통해 그려왔던 인물을 왜소화 또는 단순화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책만이나 드라마만을 보는 것보다 양쪽을 다 보는 것이 삼국지 전반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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