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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10. 2022

'외교통 정치인' 송영길의 '21세기판 조선책략'

지구본외교, 반도세력 중심론, 외교, 전략, 정치인

글은 장단점이 있다. 글은 마치 지문과 같아 쓴 사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면서도 무서운 일이다. 

어느 나라든 정치인은 책을 많이 낸다. 선거를 앞두고는 정치인들의 책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다. 선거 때 유권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책보다 더욱  잘, 그리고 값싸게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치고 자신이 직접  책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득표 활동과 바쁜 정치 행사에 쫓겨 진득하게 눌러앉아 책을 집필할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대필 작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대필 작가라도 대필을 맡긴 사람의 생각을 오롯이 담아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어중간한 대필 작가가 쓴 정치인의 책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치인들의 책을 많이 받아봤지만 마음을 담아 읽어본 책은 거의 없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송영길 전 의원이 추석 연휴 즈음 <송영길의 지구본 외교-둥근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메디치, 2020년 2월)라는 저서를 보내왔다. 자신의 외교관을 담은 책이다. 내가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고, 간간이 외교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으니까 일부러 보낸 준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이 책은 대필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직접 쓴 것"이라는 반가움이었다. 본인이 아니면 쉽게 담을 수 없는 개인적인 사색과 경험, 그리고 어투, 중복의 금기를 무시하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몇몇 대목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책 마지막의 '마무리하는 글'을 보니, 역시 "책 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직 국회의원이 정치활동을 하면서 구술 작가를 쓰지 않고 직접 글을 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는 대목이 나왔다.

이 책은 송 전 의원이 '우리나라의 생존은 외교에 달려 있다'라는 생각으로 국제외교 전략의 관점에서 한국의 생존과 번영 방안을 정리한 것이다. 제목을 '둥근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고 단 것에 관한 설명은 없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둥근 것'은 외교고 '강한 것'은 전쟁이다. 즉, 전쟁을 피하고 외교로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꾀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편 가르기와 대결적인 진영논리로 외교안보 정책을 끌고 가는 윤석열 정부가 귀 담아 들을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 책에서 그가 한반도 생존전략을 한 마디로 정리한 단어가 '반도세력 중심론'이다. 그는 책 곳곳에서 반도세력 중심론을 강조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힘의 균형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공간을 확보하자'는 주장으로, "이탈리아 반도가 지중해 해양세력과 갈리아, 게르만 대륙세력을 통합, 포섭하여 쳔년 로마제국의 번영을 이룬 것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반도세력 중심론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협력이 선제조건이 돼야 하고, 외교부의 역량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한 대로 '외교하는 민족'과 외교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외교부 예산을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고, 외교장관을 부총리급으로 격상하고, 주요 대륙을 담당하는 차관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외교부의 위상과 역량이 지금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당한 말이다. 나도 대체로 외교부 강화론에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지금 외교부가 덩치만 커진다고 해서 송 전의원이 말하는 '반도세력 중심론' 외교를 추진할 내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산 증액과 인원 확대도 중요하지만 외교 전략 개발 등 내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 더욱 시급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반도세력 중심론'과 함께 한국 외교의 한 축으로 제시하는 것이 '지구본 외교'다. "세계적인 지구온난화 문제, 해양 오염, 에너지, 재난, 물 부족, 기아, 전쟁, 테러, 마약 등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사회 헌신과 문제해결 능력을 높여나가자는 것"이다.  반도세력 중심론이 나라의 안전과 번영을 꾀하자는 것이라면, 지구본 외교로 세계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자는 뜻일 것이다.

이 책에서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분야는 역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북한과 관련한 내용이다. 미국과는 한미동맹을 교조화하거나 신화화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한 가치 공유외교를 주장한다. 중국과 관련해서는 중국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중국과 불가분의 이웃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원교근공공'이 아니라 '원교근친' 외교를 주문한다.

오사카총영사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다른 사안보다 그의 일본관이 눈에 띄었다. 그는 "새로운 의미의 친일 정치인이 되고 싶다"면서 "과거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잔재를 청산한 민주주의 국가 일본과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이 단절되지 않은 상징적 존재가 '쇼와 천황'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를 폐위나 처벌하지 않는 대신 재무장과 군사행동을 포기한 평화헌법 9조가 도입됐는데, 지금 일본이 평화헌법 9조를 무력화하려는 개헌을 추구하는 것은 과거와 단절이 아닌 계승을 꾀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지금 일본의 문제는 과거 침략주의적 일본과 얼마나 철저하게 단절하느냐와 연결되어 있다. 강제동원 노동,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과거사 갈등도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천시장과 문재인 정부 시절 초대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을 맡으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수뇌부와 관계도 깊고 러시와에 대한 이해도 깊다. 

결국 그의 외교에 관한 관심과 고민, 사색이 모이는 지점은 분단의 극복과 남북화해다. 그는 자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이유를 물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한다고 한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세력의 힘이 길항하는 객관적 구조를 잘 파악하고 활용하여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데 외교적 총력을 기울여 나가는 것, 그것이 그가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핵심이다.

이 책을 읽어 보니까 그가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현실론자임을 새삼스레 알 수 있었다. 진보권이 악마처럼 대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당대에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지도자'로 높게 평가하거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거나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에 참여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피력한 대목을 읽으면서 좀 놀랐다. 이명박 정권 때  야당인 민주당이 이전에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비준을 반대할 때 홀로 찬성을 주장하다가 곤욕을 치른 것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모든 동료 야당 의원이 반대하는 속에서 홀로 1965년 한일협정과, 베트남 전투병 파병안에 조건부 찬성론을 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화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외교전략을 주제로 직접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인물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송 전 의원처럼 한국과 주변 강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꿰뚫어 보면서 외교전략을 피력할 수 있는 정치인은 더욱 드물다.

그는 올해 실시된 20대 대통령선거(당 대표)와 서울시장 선거(직접 출마)에서 잇달아 패배한 뒤 지금은 '정치 방학'에 들어갔다. 분주하고 번잡한 정치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자신의 정치 역정을 되돌아보며 생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기회를 잘 활용해 이 책에서 제시한 '반도세력 중심론'과 '지구본 외교'를 더욱 심화했으면 좋겠다. 다음 번에는 더욱 실현성과 설득력을 갖춘 그의 외교 전략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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