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충돌, 반도체, 5G, 인공지능, 바이든, 시진핑
2023년에도 세계의 최대 화두는 '미중 패권 경쟁'의 향방일 것이 틀림없다. 2022년 10월, 21세기 최대의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각기 상대국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을 내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0월 12일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을 "유일한 경쟁 상대"로 규정하고 중국과 첨단 기술 패권에서 이기는 것을 최우선의 외교 안보 과제로 내세웠다. 이에 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제20차 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당대회, 10월 16일~22일) 보고에서 "현재 중국 공산당의 중심 임무는 중국식 현대화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전면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중국식 현대화'란 "첨단 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미국의 목표를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어 두 수뇌는 11월 14일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첫 대면회담을 하고, 서로의 의중을 타진했다. 이 회담에서 양 수뇌는 경쟁하되 무력 충돌로는 이어지지 않도록 자제한다는 선에서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 따라서 두 나라는 앞으로 당장 군사 충돌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군사 외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2023년은 그런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기술의 충돌>(서해문집, 박현 지음, 2022년 9월)은 지금, 아니 앞으도 더욱 결렬해질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을 다룬 책이다. 책을 쓴 이는 <한겨레> 박현 논설위원이다. 경제 분야 취재를 오래 해왔고 미국 특파원을 지내며 미중관계를 심도 있게 취재한 흔적과 내공이 책 곳곳에 담겨 있다. 내가 보기엔 미중의 패권 경쟁과 관련해 한국의 기자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책이다. 저널리스트답게 복잡한 사안을 쉽고 간결하게 잘 정리해, 일반 시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분량도 많지 않아 집중하면 몇 시간 안에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본문 7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왜 기술 패권이 중요한지를 먼저 설명한다. 그는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기술 변혁과 세계 패권은 뗄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갖는다"면서 증기기관을 개발해 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이어 미국이 19세기 후반 내연기관과 전기를 기반으로 한 2차 산업혁명, 20세기 후반 컴퓨터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세계 패권을 쥐어왔고, 21세기엔 인공지능과 통신망, 신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4차혁명의 시대를 맞아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기술 패권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술 패권을 쥐는 세력이 세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주인이 될 것임으로 기술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1장(긴 전쟁의 서막)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이어질 패권 경쟁에 임하는 미중 양국의 대전략을 살펴본 뒤, 기술 패권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여섯 개 분야를 각기 하나씩 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첨단기술의 핵심인 반도체, 인공지능, 5G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를 다룬 2장(세 개의 분수령)에서 미국이 맹추격을 하고 있는 중국을 떼어놓기 위해 치열하게 견제하는 모습을 추적한다. 또 3장(지상, 해저, 우주에서의 네트워크 대전)에서는 미중의 기술 경쟁이 지상에서는 5G와 데이터센터, 해저와 우주에서는 해저 케이블과 위치 정보를 둘러싸고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장(중국의 히든카드)에서는 미국의 제재에 맞선 중국의 역공 카드로 희토류를 비롯한 핵심 광물과 배터리, 전기차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5장에서는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가 미국의 달러 패권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지만 다소 부정적이다. 이어 6장에서는 기술 패권이 첨단 무기 경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7장(디커플링-21세기의 냉전)에서는 미국의 분리 공세와 중국의 대응을 짚어본다. 이어 에필로그에서 미중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선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제언한다.
나는 이 책의 핵심이 7장과 에필로그라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장은 서로 연결해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이 어느 정도로 정리될 것인가에 따라 한국의 선택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술 패권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겠지만, 미소 냉전 시대와 달리 미중 두 세력의 완전한 분리는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저자는 "안보와 직결된 일부 공급망을 (중국과) 디커플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막대한 경제적 비용 없이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경제를 완전히 디커플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는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2012년 발언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의 미중관계와 냉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상호 의존성'이 다르다는 인식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리의 정도일 터인데, 두 나라 사이에 낀 존재로 있는 한국으로서는 그것을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두 강대국의 의도와 행동에 따라 글로벌 경제, 기술 생태계가 변화의 회오리에 직면할 경우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중 사이에 전면적인 분리는 아니지만 상당 정도 분리는 이뤄질 것이고, 그것도 수십년 동안 진행되는 장기전이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한국의 전략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초강대국 사이에 낀 지정학적 숙명을 타고난 한국으로서는 어느 쪽과도 소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두 강대국 사이의 긴 경쟁을 긴장감 있게 지켜보면서 유리한 선택을 해나자는 얘기인데, 윤석열 정권은 이와 너무도 다르게 한쪽 몰빵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둘째는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경제와 안보를 철저하게 분리하면서 국익을 최대화하자는 것이다. 세계에는 미중 충돌 때 경제 단절을 우려하는 국가와 함께 미중관계 파탄을 바라지 않는 애플 등의 대기업들도 많으므로 이들과 연대해 개형형 통상정책을 지지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셋째는 한국이 앞장서 동아시아에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같은 지역 평화질서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세 제안 모두 찬성이지만, 국력과 현실성을 감안하면 한국으로서는 세 번째보다는 첫째와 둘째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요점은, 미중 패권 경쟁의 방향과 정도, 그리고 한국의 국력 수준을 정확하게 판단하면서 대격변 시대를 국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지혜와 담대한 실천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