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동형 기자들>, 익명, 군사정권, 언론
내가 <한겨레>에 재직하던 시절, 기명 칼럼을 쓴 다음에는 어김없이 편지 한 통이 날라왔다. 내가 쓴 기사를 오려서 틀린 부분을 빨간색 볼펜으로 고친 종이를 담은 편지였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은 기자들이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편지의 주인공은 <우리말 우리글 알고 바로 쓰기>(지문사, 1993년)라는 책을 쓴 재야 국어학자 이수열 선생이었다. 그의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내 기사의 절반 정도가 빨간색으로 덧칠돼 있었다. 그가 지적한 내용의 태반은 피동형 문장에 관한 것이었다.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해 그 뒤부터 신경을 쓰고 고쳤더니 차츰 빨간색의 비율이 줄어갔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쓸 때 가급적 한자어나 외래어, 피동형 문장을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인데, 당시 이 선생의 정열적이고 따끔한 지적이 큰 지침이 됐다. 2017년 초에 내가 신문사를 떠난 뒤부터는 이 선생의 편지를 받아볼 수 없게 됐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선생은 2021년 고인이 되셨다. 이 선생과 같이 사명감을 가지고 기자들의 잘못된 글을 지적하는 분이 없기 때문에 요즘의 신문 보도글과 방송의 보도말이 더욱 엉망이 됐는지 모르겠다.
<피동형 기자들>(효형출판, 김지영 지음, 2011년)은 우리 글과 말을 훼손하고 왜곡하고 있는 피동형 보도 문장을 고발한 책이다. 아울려 피동형 문장과 단짝처럼 따라붙는 익명 표현도 문제 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낸 고참 언론인 김지영씨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언론인이 피동형 보도 문장의 문제점을 주제 삼아 본격적으로 단행본을 낸 것은 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씨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피동형 저널리즘을 고발한다'는 서문에 잘 나와 있다. 그는 "피동형 남용은 말단 수습기자 시절부터 머릿속에서 맴돌던 주제"라면서 "피동형 문장은 행동 주체가 없어 구체적인 것을 유보하는 표현이며, 책임성이 희박하다"고 지적했다. 즉, 피동형 문장은 사실을 위주로 하며 책임이 따라야 하는 보도 문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은 능동형 중심의 언어인데, 이런 피동형 문장이 우리말을 파괴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피동형 문장과 함께 익명 표현에도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정확성, 객관성, 공정성을 삼 요소로 하는 객관 보도를 해치는 두 주범이라는 것이 징죄의 이유다.
그는 책의 서두를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수습기자로서 계엄사 언론검열단에 사전 검열을 받으러 갔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80년대 초 군부독재 시절, 기자들이 군부 세력을 미화할 때 자주 사용하던 문장이 피동형이었다는 점이 그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당시 군부 세력에 찬동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던 많은 기자들이 '수동형 문장 두에 숨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 그가 책에서 예를 든 군부 세력을 지지, 찬양하는 기사들은, 거의 피동형 문장으로 돼 있다. 그 중에 예외가 있었는데, 당시 <서울신문> 주필이었던 이진희씨처럼 신군부를 내놓고 지지했던 사람들은 능동형 문장을 썼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는 보도 문장 등 우리말 문장에 피동형이 늘어난 것은 1차적으로 일본 식민지 때 일본 문장의 영향이 컸고, 뒤이어 해방 이후 미국의 수동태 문장의 영향이 더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1961년 군사 쿠데타로 권위주의적인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동태 문장이 훨씬 증가했다고 말했다. 최근(책을 집필할 2011년 당시)에는 이런 추세가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피동형 문장이 난무하는 실정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일본의 영향이 본격화하기 전의 <독립신문>에는 수동형 문장이 거의 없었다는 점만 봐도, 피동형 문장의 유행은 외세의 영향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피동형 문장의 범람 속에서도 박경리, 박완서, 조정래, 박범신, 이문열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들은 피동형 문장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그들이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소개하면서 '문장가는 피동형을 싫어한다'라고 제목을 달았다. 모르면 몰라도 피동형을 쓰는 기자들에게 넌지시 자극을 주자는 뜻에서 그랬을 것이다.
또 근대화 이후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성경도 영어의 수동형 문장을 일일이 능동형 문장으로 바꿔 번역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매우 중요하고 인상적인 내용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글 문장의 대가나 성경의 번역자들은 주체와 책임이 명확한 문장, 또는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문장을 중시하는구나 하는 존경의 마음이 일어났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문, 방송 보도에서 피동형 문장과 익명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기 위해, 2009년 3월 23일자의 5개 종합 일간지(경향, 동아, 조선, 중앙, 한겨레)의 지면 뉴스를 분석했다. 방송은 2011년 6월 2일의 <한국방송>, <문화방송>, <서울방송> 저녁 뉴스를 분석했다. 신문이나 방송 모두 하루 치를 골라 분석한 것이어서 학문적인 엄밀성은 떨어지지만, 대략의 경향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신문이나 방송 모두 피동형 문장과 익명 보도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입말을 위주로 하는 방송 보도에서조차 피동형 문장이 신문에 버금갈 정도로 많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 정치, 검찰 등 권력기관과 관련한 보도에서 피동형 문장과 익명 보도가 많았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권력이 셀수록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관행과 문화가 있다는 것, 기자들도 그들의 의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런 사실은 앞으로 누가 본격적으로 연구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미디어 격변기, 공공 언어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나가는 글에서 "영어와 일본어가 피동형(수동태)의 '시조', '중시조'를 다툰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을 뺨칠 정도로 피동형을 많이 쓴다"면서 세계화와 정보화의 거센 파도와 함께 미국의 영향력, 영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칫 방심하다가는 국어를 피동형 중심 언어로 망치기 십상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가꾸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말했다. 신문, 방송, 인터넷의 글과 말은 공공 언어의 전령이자 국민에게 살아 있는 '매일의 교과서'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언론의 책임에 비해 우리 말과 글을 잘 다듬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언론의 자각이 부족함도 한탄했다. 자각이 부족하니 의지가 부족하고, 의지가 부족하니 기획과 예산, 인력이 부족하고 , 기자들에게 변변한 언어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신문, 방송의 보도 글과 말은 매일 매일 국민에게 '국어 교과서' 노릇을 하고 있으며, 국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매체의 언어를 따라 배운다. 신문, 방송의 기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런 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우리말과 글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