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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r 27. 2023

미중 '반도체 전쟁'과 한국의 활로

<반도체 삼국지>, 중국, 일본, 한국, 미국, 대만, 미중 패권

"젊었을 땐 서유기를 읽지 말고 늙어선 삼국지를 읽지 마라"는 중국 격언이 있다. 소년기에 환상과 낭만이 넘치는 서유기에 빠지면 환상이 도를 넘게 되고, 노련하고 경험 많은 노년기에 삼국지에 몰입하면 권모술수가 도를 넘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뜻에서 나온 말이란다. 그만큼 서유기와 삼국지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는 뜻일 것이다.

천하쟁패를 겨루는 위, 촉, 오 세나라 사이의 합종과 연횡, 경쟁과 협력, 권모술수를 그린 삼국지는, 지금도 국제관계나 정치인, 기업 사이의 경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틀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어떤 정치인을 '유비 형'이나 '조조 형'으로 분류해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제나 국제 분야의 사안에서  '삼국지 경영'이나 '삼국지 같은 정세'니 하는 조어를 자주 본다. 비록 삼국지를 완독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의 줄거리 정도는 숙지하고 있으니, 어떤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반도체 삼국지>(뿌리와이파리, 권석준 지음, 2022년 10월)는 최근 미-중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의 향방을 소설 삼국지처럼 흥미롭게 다룬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나라는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 대만이다. 등장하는 주요 나라만 보면 반도체 삼국지보다는 '반도체 오국지'나 '반도체 춘추전국'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책의 구성을 보면 필자가 왜 제목에 삼국지를 넣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가 일본, 2부가 중국, 3부가 한국, 4부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 패권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미-중 사이의 기술 패권 경쟁을 저류에 깔면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어떤 도전에 직면해 있고 어떤 활로를 찾으려고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반도체, 반도체 산업이라는 특수 분야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도 많이 나온다. 저자가 워낙 그쪽 방면에서 내로라 하는 전문가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반도체 관련 전문 용어를 풀이 없이 영어 약자로 쓰고 있는 것이 흠이다. 영어 약자를 처음만이라도 원래 단어로 풀어 써줬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반도체 산업의 전략이라는 큰틀에서 얘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이런 불친절함이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장애를 줄 정도는 아니다.

저자는 '반도체 전쟁의 시대'라는 서문에서, 왜 반도체가 중요한지를 먼저 설명한다. 그는 반도체를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 세계 경제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던 석유와 같은 존재로 규정한다. "20세기 후반 석유가 세계 경제와 국가 간 분쟁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면, 21세기 초중반으로 접어드는 현 시점에서는 반도체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반도체 생산의 거의 대부분을 떠맡고 있는 한, 중, 일과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21세기의 페르시아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미국의 설계-동아시아의 생산-중국의 소비라는 생태계 속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이런 반도체 생태계가, 미국이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칼로 빼들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됐다. 미국 자신이 중국에 기술 이전을 봉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 대만 등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 70% 달성을 목표로 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중국 제조 2025'는 난관에 봉착했고, 미국의 기술과 공급망에 의존해 반도체 기술과 산업을 키워온 한국, 대만, 일본은 새로운 대응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 책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중국,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걸어온 길과 대응 방안을 살펴보고 있다.

1부에서는 90년대 중반까지 30년 가까이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개를 차지할 정도로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온 일본이 왜 몰락했고,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는지를 짚어본다. 저자는 일본 반도체 산업이 몰락한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로  '성공의 실패'를 꼽았다. 기술적으로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고 완벽함을 완성했지만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즉 '갈라파고스화'하면서 추락했디는 것이다. 또 정부가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고, 미국의 1985년부터 반도체 협정을 통해 견제하 것이 몰락의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그러나 미-중 반도체 패권 갈등을 계기로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특히 일본의 몰락을 배경을 급성장을 이룬 한국으로서는 앞으로 위기 국면에서 일본의 몰락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중국이 왜 반도체 굴기에 그토록 힘 쓰는지, 그리고 한계는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중국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큰 내수시장, 엄청난 인적 자원,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술 탈취 등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해왔으나, 미국의 본격적인 견제에 나서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나노 10 이하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정밀한 광원 기술이 꼭 필요한데, 미국이 기술 이전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십여년 이내에 이런 기술을 자체 개발하기가 어렵게 됐다. 중국은 중저급의 반도체 생산을 하면서 미국의 봉쇄가 풀릴 것을 기다리든가 새로운 양자 정보통신기술로 돌파하든가 하는 선택의 길, 즉 독자 생태계를 구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국면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국이 어떤 경우든 반도체 굴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으로서는 미-중 경쟁 과정에서 미국의 논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중국의 기술 발전 과정을 끊임없이 치밀하게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3부에서는 한국 반도체의 역사를 일별한 뒤 격변하는 위기 속에서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기서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독보적인 1위 기업인 대만의 TSMC와, 강소국인 네덜란드의 반도체 산업 육성을 본받을 사례로 제시한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경쟁 상대인 TSMC는 설계는 하지 않고 맞춤형 생산에만 주력한다. 때문에 애플 등의 회사가 기술 누출의 걱정 없이 생산을 맡기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설계부터 생산까지 일관해서 하기 때문에 고객이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결국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 TSMC와 본격적으로 경쟁을 하려면 파운드리 분야를 독립회사로 분리하느냐 마느냐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지금 10나노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네덜란드 장비업체는 ASML의 장비가 필수적인데, 네덜란드가 이런 기술을 개발한 것은 수십년 간 장기 투자를 한 결과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의 대학이 이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단순히 이 정부가 바라는 것처럼 인력을 양성하는 공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세대 정도 후에 전략산업의 핵심이 될 지식과 플랫폼을 준비할 수 있는 과학자들, 엔지니어들, 그리고 전략가의 양성이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정부 관계자들이 경청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앞으로 미-중 기술 갈등, 산업 갈등, 나아가 패권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대체 불가능한 포지션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293페이지)라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 책은 미-중의 전면적인 갈등 가운데서도 기술 패권, 기술 패권 중에서도 반도체 산업 분야만을 뽑아 다루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미-중 전면적 갈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무가 먼저냐, 숲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이 책은 나무를 통해 전반적인 상황의 이해를 돕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능수능란한 글 솜씨 덕에, 난해한 기술 분야 얘기를 소설처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의 재주와 노력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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