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절망에 빠진 한국 사회의 구원에 나서다
뱀파이어 환타지소설, 성일권, 르몽도디플로마티크, 소설가, 사과
예전에는 소설가나 시인이 되는 길이 매우 좁았다. 신문사가 연초에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예지의 추천을 받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두 길 모두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이렇게 좁은 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길목을 지키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공개 경쟁과 비슷한 신춘문예는 그렇다손 쳐도, 문예지 추천은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 기성 문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이런 역학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문단 권력'이다. 추천은 곧 제식구를 만드는 것이고, 이렇게 모인 식구들이 다른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을 지원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힘을 키워나갔다.
문단 권력은 지도와 비판을 통해 작가를 성장하게 하는 좋은 효과도 있지만, 불미스런 일이 벌어져도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표절 논란의 신경숙 작가를 감싸다가 비판에 직면했던 창비 사건, 미투에 휘말린 고은 시인의 시집을 출판해 물의를 빚은 실천문학사 사건이 대표 사례다.
요즘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다는 작가가 되는 길이 넓어졌다. 직접 출판으로 작가가 될 수도 있고, 네이버 등의 포털 기고를 통해 작가가 되는 길도 있다. 이와 함께 문단 권력도 점차 힘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기존의 통로를 통해 등단하는 '적자 작가'와 다른 길을 통해 등단하는 '서자 작가'의 차별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온존하고 있다.
최근 출판을 통해 직접 소설가가 된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아르망이란 필명(가명) 작가의 <푸른 사과의 비밀>(이야기동네, 아르망 지음, 2023년 2월)이다.
작가로부터 직접 책을 받아 읽게 됐다. 그러니까 작가의 실명도 안다. 이 글의 마지막에 공개하려고 한다.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뱀파이어 환타지 소설이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사람을 물어뜯어 죽이고 하는 전형적인 뱀파이어 소설과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일종의 뱀파이어를 내세워, 사회문제를 다룬 환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문학은 잘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언뜻 떠올랐다. 환타지를 섞어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흥미 있게 파헤치는 것을 보고 든 생각이다.
두 권으로 된 이 소설은 합정동 절두산 기슭에 사는 뱀파이어(파스칼)가 실연을 하고 양화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해 자살하려는 소녀(민주)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계기로 파스칼을 우두머리로 하는 뱀파이어 무리와 민주가 만나게 되고 뱀파이어와 민주를 비롯한 인간이 협력해, 서열중심의 교육, 엘지비티퀴어(LGBTQIA)의 성 소수자 차별,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유전자 조작 등 생명 경시 등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 문제를 파헤치고 해결을 모색하는 것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합정동, 망원동, 서교동 일대다. 그쪽에 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골목길 묘사와 역사가 생생하게 나온다.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포교를 계기로 천주교 박해 사건이 줄줄이 일어났고 이 중 대표적인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 절두산 성지도 이 구역에 있다. 절두산과 병인박해도 이 소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 소설의 추구하는 방향은 뱀파이어들이 만든 이른바 <망원동 5대 강령>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5대 강령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망원동 5대 강령>
첫째, 인간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친구이며, 우리는 절대로 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는다.
둘째, 동물은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친구이며, 우리는 절대로 동물의 피를 탐하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불에 익히지 않거나 가공되지 않은 육류와 생선류를 먹지 않는다.
넷재, 우리는 몸에 부족한 비타민, 단백질, 지방, 철분, 인, 마그네슘 등 영양소를 인간이나 동물의 피가 아닌, 영양제에서 섭취하도록 한다.
다섯째, 우리는 궁극적으로 비건주의를 지향하며, 이를 위해 체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청결을 위해 비린내를 없애는 레몬 향을 상시 구비한다.
이 선언을 읽어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가 단지 현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비건주의와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화합을 향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프랑스 이야기와 프랑스어 이름이 유독 많이 나오는 데 작가의 배경과 관련이 있다. 작가는 속 표지에 자신을 "파리와 서울의 뒷골목에 대한 동네 이야기를 채집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가 힌트가 숨어 있다. 또 책 곳곳에 철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 종교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스며들어 있다. 이를 통해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작가의 교양의 넓이와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이제 작가의 가면을 벗길 때다. 작가는 프랑스의 유명 월간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는 성일권씨다. 성씨는 <경향신문>과 <문화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프랑스 파리 제8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딴 프랑스통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 본사는 합정동 언저리에 있다. 이쯤 하면, 이 소설의 배경이 왜 합정동 근처이고, 소설 속에 프랑스 얘기가 왜 많이 나오고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실명 공개를 꺼렸지만, 이름을 알고도 공개하지 않는 것의 근질근질함을 참지 못하는 버릇이 발동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이글을 통해 작가의 양해를 구한다.
성씨는 아르망을 필명으로 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헤르만 헷세의 프랑스어 발음이 아르망이고, 뱀파이어 소설로 유명한 뱀파이어 연대기의 한 주인공이 아르망인 것에 착안했다고 했다. 성씨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코로나가 한창일 무렵 말끔한 차림의 40~50대 신사 숙녀가 합정역 근처 커피숍에 맥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혹시 뱀파이어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성씨는 애정 문제를 끼워 넣지 못해 책이 잘 팔릴까 걱정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와 관계없이 재미 있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이 왜 <푸른 사과의 비밀>인지를 알 수 있는 본문 중의 단서를 적는 것으로 문학 문외한의 소설 서평을 마친다.
"우리는 너의 능력을 빌려서 인류의 미래를 구하고 싶어. 아담이 금단의 빨간 사과를 먹고 인류의 시초가 되었고, 스티브 잡스가 그 후 흐트러진 인류를 한데 묶으려 설익은 사과를 베어 물었지만, 정작 인간계는 혼돈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어. 우리는 너와 더불어 사랑의 과즙이 풍부한 푸른 사과를 심어 인간계에 결핍한 공감력을 다시 재생시킬 거야."-파스칼이 민주에게 보낸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