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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18. 2021

'새로운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제언

<제국일본의 사상> 김항


<제국일본의 사상>(창비, 2015년, 김항)은, 나 정도의 평범한 지력을 가진 사람이 읽기에 아주 벅찬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더구나 그냥 읽는 것과 책을 읽고 뭔가 쓰겠다고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에너지 소비량이 현격하게 다르다. 기자 시절, 동료들끼리 우스개 소리로 "기사를 안 쓰면 정말 기자가 할 만한 직업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만난 것은 매우 우연이었다. 오사카총영사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4월 중순, 평소 잦은 교류를 해온 리츠메이칸대학의 나카토 사치오 교수(국제관계학부 부학부장)와 송별 점심을 했다. 이때 나카토 교수와 함께 기미지마 아키히코 학부장(헌법 전공)이 나왔다. 대화를 나누던 중 기미지마 학부장이 한국 사람이 쓴 책이라면서 두 권의 책을 꺼냈다. 나는 책을 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기미지마 교수는 책을 소개하고 싶어 가져왔다고 했다. 바로 그 중의 하나가 <제국일본의 사상>의 저자인 김항씨가 쓴 <제국일본의 閾(문턱)>(암파서점, 2010년)이었다. 이 책은 김씨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또 다른 한 권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할까 한다.

기미지마 교수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일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책이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한국의 학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시점에서 쓴 대단한 책이다"고 말했다. 또 내가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으로 일할 때 칼럼 필진으로 영입했던 진보적 성향의 철학자 다카하시 데츠야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였다는 것도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 흥미'가 생겨서 사무실에 돌아와 정보를 찾아봤다. 아직 한글 번역본은 없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일본어 책을 구해 읽어봤다. 일본 유수의 철학자와 문학가의 사상과 글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저자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주눅이 들면서, 정말 어렵게 독파했다. 대체적인 내용은, 일본이 제국을 경영하면서 제국의 일원으로 넣어주지 않은 존재, 즉 '예외지대'가 조선으로 대표되는 대만, 오키나와, 아이누, 여성 등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제국의 내로라 하는 학자와 문인들이 서양과 닮은 국민국가를 세우려고 발버둥쳤지만 이런 예외지대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독해한 내용이다.

한국에 돌아와 이 책의 번역본이 나왔으면 한글로 한 번 더 읽고 싶어 찾아봤으나, 아직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제목의 <제국일본의 사상>이 있었다. 이 책은 <제국일본의 문턱>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 '제국일본'이란 단어가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문턱>이 일본이 국민국가 형성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힌 것이라면, <사상>은 '국민국가 일본'을 형성하는 데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 '식민지', '아시아와 한반도'를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미시마 유키오, 이광수, 염상섭, 야스이 가오루, 고바야시 히데오 등 한일 학자 및 문인들의 글을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바람직한 동아시아 건설을 위해서는 어떤 자세와 실천이 필요한가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오롯이 담겨 있다.

"탈식민을 지향한 한국의 기획은 이 음산한 총독의 소리를 두더지 잡기처럼 때리기에 급급했다. (중략) 파시즘과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현재로부터 일소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와 같이 1945년 이래 한반도와 열도에서는 제국이라는 지층을 덮어버리기 위한 지성의 콘크리트 공사가 진행됐다."(9페이지)

"개별 국민국가가 아무리 콘크리트 공사를 통해 덮어버리려고 해도 주권, 식민지, 아시아를 발화하는 순가 콘크리트 관은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하기 마련이다. (중

략) 미래를 향한 건설적 관계를 아무리 외쳐도 전망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둡다. 그 건설이 콘크리트 공사로 이뤄지는 한에서는 말이다."(10페이지)

결론적으로 그는 "근대적 사유가 꿈꾸고 원하던 단호하고 강인한 주체의 세계"가 아니라 "비겁하고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실존"과 마주할 때, "포스트 제국의 동아시아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사랑이 넘치는 분열적 공생의 장소로 재전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강자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한국은 동아시아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데 적임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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