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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09. 2023

일본은 '아버지 부재'의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나?

헤이세이사, 중국화하는 일본, 요나하 쥰, 한일관계

2010년 경 참신한 주장을 하고 나선 일본의 신진 학자 두 명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일본이 2차대전 패전 후 전전의 천황 대신 미군을 극진히 모시며 패전을 부인한 채 전전의 아시아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한다는 내용의 <영속 패전론>을 쓴 시라이 사토시 교토세이카대 교수와, <중국화하는 일본>이라는 책을 들고나온 요나하 준 오키나와대 교수가 그들이다.


참고로, 요나하씨가 말하는 '중국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짐작하는 공산주의 또는 권위주의와 같은 내용과 전혀 다르다. 그가 말하는 중국화는 송대에 확립된 신분제 철폐와 자유시장경제, 그리고 중앙집권제를 가리킨다. 그 책을 읽어 본 기억에 따르면, 일본이 21세기 들어서야 중앙집권과 기회의 평등 등 중국식 세계 기준(중국화)의 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면 책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시라이 사토시 교수는 이후에도 꾸준히 화제의 책을 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비판적 지성인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요나하 준 교수는 후속 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요나하 준 교수의 동정이 궁금하던 차에 오사카총영사 시절에 가끔 만나던 시라이 교수에게 물어보니 조울증을 심하게 앓으면서 교수를 그만둔 것으로 안다는 말을 들었다. 전도유망한 학자의 글을 다시 만나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조울증으로 전공인 역사 공부도 접고 은퇴했다는 요나하씨가 일본 헤이세이 시대(1989~2019년)의 역사를 정리한 책 <헤이세이사>(마르코폴로, 이충원 옮김, 2022년 12월)를 최근 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책을 냈다고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 공부를 재개한 것은 아니다. 그 때문인지 이 책도 본격적인 역사 연구서가 아니라 한때 역사를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자기가 살고 활약했던 시대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교양서의 모양새를 취했다.


요나하씨는 헤이세이 30년(1989~2019년)을 1년 내지 2년, 또는 3년으로 끊어 모두 15장으로 나눴다. 그리고 각 장마다 그 시기의 특징을 개괄적으로 요약한 뒤, 정치와 경제 동향뿐 아니라 학계와 문화계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끌어들여 설명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한 장을 읽을 때마다 그 시기의 동향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덕분에 외국인들은 전혀 포착할 수 없는 일본 사회 내부의 깊숙한 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일본 사정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나도 전후좌우, 동서고금을 오가며 펼쳐 놓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따라가기 벅찼다. 나도  그의 얘기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기초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절감했다.


저자는 "헤이세이 시대는 '포스트 냉전'과 함께 시작됐다"면서 "냉전의 종언은 국제정치 역학의 변화뿐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쇼와 시대(1926~1989년)의 일본을 지탱했던 두 기둥(히로히토 천황과 소련)이 사라지면서 아버지 없는 시대가 헤이세이 시대를 관통하는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즉, 헤이세이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모든 면에서 아버지 노릇을 했던 두 기둥이 없어지면서 어린이들이 아웅다웅하는 시대로 변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중도가 사라지고 우경화 흐름이 강해지면서 그동안 천황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이 우경화의 견제 역으로 천황(아키히토)에 의존하는 현상도 이 시대가 낳은 묘한 표정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이 책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역사적인 시기가 달라 갈등하고 서로 엇갈리는 모습도 간간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 전체가 '역사 없는 시대'로 치닫고 있는 중인데 한국에서 촛불 혁명으로 역사가 강화되는 흐름이 형성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는 식의 얘기가 나온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간파하기 어려운 분석이다.


저자는 이 책의 후기에서 "어쩌면 현재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지배한 냉전 시기와, 그 업데이트인 '미중 전쟁' 시대의 틈바구니에 해당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전에 역사학자였던 자의 눈으로 봤을 때 이만큼 사상적으로 빈약하고, 씁쓸한 '전쟁 사이 시기'가 있을까요"라고 말한다. 그만큼 지금 시대가 좌표를 잃고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땅에 도착했을 때 예전 의미에서 '역사'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이름이 아닌 형태로 시작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라면서 새 출발을 다짐한다. 


다만 그의 새 출발은, 이 책을 "'역사학자'로서 쓰는 마지막 책"이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학자들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선 지점에서 시작될 것 같다. 부분을 넘어 전체를 조망하는 그의 새로운 대작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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