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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30. 2023

외교에서 '자국 중심성'은 왜 중요한가?

정세현, 정세현의 통찰, 통일 전문가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노인이 가진 경험과 지식, 지혜가 귀중하다는 얘기다. 



평범한 노인도 그 정도일진대, 하물며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지닌 정보량과 가치는 어떠하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정세현의 통찰>(푸른숲, 정세현 지음, 2023년 2월)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세현(78) 전 장관은 1977년 통일부 전신인 국토통일원에 들어간 이래 2021년 8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40여 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남북관계를 다뤄온 통일·남북관계 전문가다. 통일·남북관계가 국제정치와 동떨어져 전개될 수 없으니 국제문제 전문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 맡았던 주요 직위만 대충 둘러봐도 대통령 통일비서관(김영삼 정권), 통일부 차관(김대중 정권), 통일부 장관(김대중, 노무현 정권),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문재인 정권)을 지냈다.



그는 이 책에서 50년 가까이 통일 문제, 국제 문제를 다루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 반성을 총동원해 앞으로 우리나라 외교가 나아갈 방향을 내놨다. 그 중심에 '자국 중심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외교의 세계에서는 내 나라가 아니면 모두 남의 나라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외교관이 되더라도 남의 나라 이익을 위해서 종사하는 외교관이 되지 말고, 내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고생하는 그런 외교관이 돼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을 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내 나라와 남의 나라를 분별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어느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분주하게 뛰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어리석을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가 '자국 중심성'에 눈을 뜬 계기를 만들어 준 서울대 외교학과 재학 시절 은사인 이용희 교수의 말이다. 그는 '자국 중심성'의 기준을 가지고 공직 생활을 돌아보니 외교안보 관련 부서 중에서 특히 외교부가 자국 중심성을 잃은 보고서가 많았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새 정부(윤석열 정권)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외교의 자국 중심성뿐 아니라 남북관계나 통일 문제가 국가 목표에서 그 우선순위가 낮아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든다"면서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 "대한민국 외교의 자국 중심성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통일·외교·안보 분야에 종사하는 후배 공무원과 연구자들에게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책은 5부로 구성돼 있다. 1부(국제정치의 세계)에서는 적도 친구도 없고 힘에 의해 질서가 형성되는 국제관계의 본질을 여러 역사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이어 2부('팍스 시니카' 이후 서구 세력의 등장과 팽창하는 일본)에서는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저앉는 중국과 변화를 빠르게 포착해 부상하는 일본, 그리고 그 속에서 방향을 잃고 몰락하는 조선을 살펴본다. 



정 전 장관의 글은, 누구나 술술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인 게 장점이다. 곳곳에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화나 자신의 경험을 녹여 썼기 때문에, 글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도 장점이다.



3부(미소 냉전 시기의 국제정치), 4부(미일 일방주의 시대, G2로 올라선 중국과 선진국이 된 한국), 5부(21세기 G2시대, 다시 격동하는 국제질서)에서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의 국제관계를 다루고 있다. 시간이 현재로 근접할수록 책의 긴장감도 더욱 높아진다. 현재의 고민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해방 후 많은 정권 중에서도 노태우 정권,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이 상대적으로 '자국 중심성'을 가지고 국제관계를 풀어내려고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이 해외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는 199개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해 준 나라인데, 노무현 정권이 날짜까지 확정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환수하려고 한 것은 역사적이었다고 말했다. 



3부 이후 대목에서 나의 눈을 붙잡은 부분은 세 가지였다. 북핵 책임 문제, 원칙의 굴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외교의 방향이다.



그는 북핵 문제의 발생과 심화에 북한 못지않게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압박을 강화하고 약속을 어겼을 때 북한은 핵 능력을 강화했음을 사례를 들며 조목조목 설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이뤄진 '9.18 합의'의 다음 날에 미국이 북한에 금융제재를 발표한 것이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북한은 맹 반발하며, 결국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그의 북핵 해법이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에 결단을 내려달라고 협조 요청을 해야 하지만 때로는 비판도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는 "국민 여론도 일어나야 한다. 북한만 욕할 게 아니라 미국도 비판할 수 있어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핵 문제에 임하게 되고, 우리 국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북핵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과 관계에서 '원칙의 굴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문재인 정권 때 '4.27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 등 획기적인 남북합의를 해놓고도 하나도 제대로 진전시키지 못한 것은 미국의 제시한 '한미워킹그룹'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워킹그룹을 통해 대북정책을 조율하자고 해놓고 사사건건 남북 합의사항의 이행을 방해했다. 심지어 2019년 북한에 독감이 유행해 문재인 정권이 북한에 독감 약을 보내려는 것마저 막았다.



그는 이것을 '원칙의 굴레'로 표현하면서,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권 때에 이미 '한미공조'라는 원칙이 굴레가 됐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북핵과 관련한 미국의 방침에 자주 제동을 거니까, 미국이 '한미공조' 원칙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김 정권을 구속하는 강한 족쇄가 됐다는 것이다. 결국 20년 전의 교훈을 성찰하지도 전수받지도 않고 일을 하니까, 2019년에 보듯이 비슷한 일이 반복해 일어났다는 얘기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 북핵 문제는 더욱 풀기가 어려워졌다고 전망했다. 핵을 해체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본 북한이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는 "북핵 문제를 한미동맹 강화로 대응한다면 미국은 우리에게 한미일 삼각동맹을 압박할 테고 그러면 우리는 일본 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확인했듯이 지금 윤석열 정권이 추구하는 방향인데, 그 몇 개월 전에 낸 책에서 그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그가 두 번째 방법으로 제시한 방법은, 즉 '정세현 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북연합이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상태에서는 적어도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 외교의 과제라면서 이 방법을 내놨다.   



"우리는 결국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지만 비굴한 을이 되지 않을 길을 찾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중국의 관계처럼 북한이 우리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략> 경제적으로 북한과 협력관계가 긴밀할수록, 즉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에 의존할수록 우리를 도발하기 어렵다."



그의 분석과 대안에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50년 가까이 남북관계, 외교 문제를 고민해온 그의 통찰이 우리 사회의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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