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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r 04. 2024

'역사 지우기' 세력에 맞선 개인의 '기록 투쟁'

14세 징용자, 강제동원 노동, 식민지, 역사전쟁

윤석열 정권 들어, 일제의 흑역사를 지우려는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조선을 강제로 병합해 수탈과 탄압을 일삼아 온 가해자 일본 쪽이야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하지만, 피해자 쪽의 한국 사람들마저 이런 일본의 주장과 논리에 춤을 추고 있으니 환장하고 복통 터질 일이다.

<반일 종족주의>와 같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미화하고 포장해 선전하는 3류 친일 지식인들의 책이 몇 해 전부터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나오더니, 이제는 아예 정부가 대놓고 반일 무장 독립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사에서 파내려고 안달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을 마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무식쟁이로 매도하고, 매국 행위를 하는 것인 양 으름장을 놓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족속들이 정부 주요 부서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판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들에게는 그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희생물이 된 일본군'위안부'도 강제동원 노동자도 한일 화해를 위해 빨리 걷어치워야 할 걸림돌일 뿐이다.

<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논형, 지성호 지음, 2024년 1월)은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일제의 식민 역사를 지우려는 세력에게 통쾌한 똥침을 날리는, 한 개인의 처절한 기록이다. 전북대학교에서 30년 동안 음악 이론과 작곡을 가르쳤던 작곡가인 지성호 씨가 아버지가 겪은 실화를 기록과 증언을 기초로 재구성한 책이다.

지성호 씨는 아버지 재관(책에서는 '재호'라는 이름으로 나옴) 씨가 펴낸 두 권의 책(<도벌에게 짓밟힌 엽전>과 <지석교회 백년사>)을 바탕으로, 아버지가 일제 말기인 1943년부터 46년까지 겪은 개인 수난사를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아들이 이제 90살이 훌쩍 넘어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위해 펴낸 '사부곡'이지만, 내용은 아버지를 통한 민족 수난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실록이 아니라 소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저자의 문체가 뛰어나고 인물과 상황 묘사가 뛰어나다. 작곡가로서 예술적인 감각을 타고난 저자가, 음악에 기울였던 것 이상의 열정과 애정을 이 책을 쓰는 데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리라.

저자의 아버지 재호는, 1943년 14살 때 형 대신 강제 노동을 위해 끌려간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조선인이 형을 끌고 가려고 왔다가 논에 일하러 나간 형 대신, '꿩 대신 닭'이라도 되는 양 그를 끌고 갔다. 부여 출신인 재호는 같은 군에서 끌려온 청년들과 함께 갇혀 있다가 일본의 홋카이도에 있는 미쓰이 광산주식회사 산루광업소로 가 강제노동을 한다. 

조선에서 끌려가는 과정과 산루광업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면사무소와 지서 등 일본의 행정기관과 기업이 하나가 되어 조선인들을 강제로 착취하고 수탈한 것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강제로 끌고 가 도망하지 못하게 감금· 감시하고, 감옥보다도 더욱 혹독한 환경에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한 인간의 삶이 온통 고통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듯이, 재호가 다치고 도망갈 때 인간미 넘치는 일본인 간호사, 아이누 가족이 돕는 아름다운 얘기도 나온다. 

문제는 이런 것이 소설 속의 일이 아니라, 재호를 비롯한 무고한 수많은 조선 출신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실제 삶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개인의 구체적인 고통과 삶을 보지 않고, 숫자나 겉모습만 보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말하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올랐다.

재호는 결국 가혹한 홋카이도 광산의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탈출한 동료들과 함께 공사 현장을 전전하다가 일본의 패전을 맞아 기적적으로 고향으로 귀환한다.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 운동을 했던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소학교까지 마쳤던 재호의 영민함과 가족애가 없었다면, 이런 행운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수많은 평범한 강제 동원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혹독했다는 얘기다.

이 책은 결코 한 개인의 얘기가 아니다. 한민족 대부분이 당시 겪은 고통의 역사이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경험한 살아 있는 역사다.

일제 강점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그때의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무겁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런 기록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지우려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 있는 무기일 터이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 지성호 씨는, 이 책을 냄으로써 효자 노릇뿐 아니라 애국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그가 아버지 강제노동했던 현장인 산루광업소를 찾아 일본 열도를 더듬어 가는 여정은, 바로 고난과 고통의 민족사를 디엔에이 속에 남겨 후대에 전달하겠다는 결의처럼 느껴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자연히 떠오른다. 역사를 지우려는 자들이 날뛰고 있는 이때 그 중화제로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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