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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y 20. 2024

<서평> 미 군정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해방직후사, 정병준, 해방정국, 여운형, 인공, 건국준비위

일본의 저널리스트(문예춘추사 편집자) 출신 작가로, 쇼와시대의 역사 저작물을 많이 낸 한도 가즈토시(1930.5.21~2021.1.12)라는 사람이 있다. <쇼와사><일본에서 가장 긴 하루><노몬한의 여름> 등이 대표작이다.


<일본에서 가장 긴 하루>는 쇼와 천황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하기로 결정한 1945년 8월 14일 정오부터 24시간 안에 황궁을 중심으로 항복파와 그에 저항하는 군부세력의 알력을 자료와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패전 마지막까지 항복파와 항전파의 다툼이 치열하게 다툰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역사를 알게 된 것도 놀라웠지만, 저자가 하루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낼 만큼 치밀하게 취재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1945년 해방 직후사 -현대 한국의 원형>(돌베개, 정병준 지음, 2023년 11월)은 마치 한도 가즈토시의 <일본에서 가장 긴 하루>를 방불케 하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돼 있는데, 특히 1장(폭풍 :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총독부의 종전 대책과 이중 권력의 창출)이 그렇다.


물론 1장에서 해방된 8월 15일 하루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일을 전후해 총독부와 여운형의 건국 준비위, 김성수와 송진우를 비롯한 한민당 세력의 밀고 당기기를 새로 발굴한 자료를 기초로 세밀하게 그렸다. 총독부는 소련의 한반도 전역 진주를 상정하고 조선인들의 폭동을 방지하는 치안 대책 차원에서 국내에 기반이 탄탄하고 좌파에 영향력이 큰 여운형을 활용하려고 했고, 여운형은 일본의 치안 대책 협조 요청을 이용해 건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반면, 친일 성향의 한민당 세력은 여운형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밀접한 관계에 있지도 않은 중경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방해했다는 게 1장의 주요 내용이다.


"8월 15일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날이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8월 16일은 서대문 감옥 문이 열리고 독립투사들이 풀려난 해방의 날이었다. 8월 17일은 전국에서 해방 경축식이 벌어진 날이었다. 3일 만에 세상은 일제의 철권통치에서 일제의 패망으로, 거대한 식민지 감옥에서 독립투사들이 석방되는 한국의 해방, 해방의 한국으로 변모했다. 혁명적 시기의 혁명적 변화,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조치, 비상한 수단의 결과였다."(94쪽)


저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과)는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근현대사 연구자다. 그가 쓴 책의 목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학자인지 알 수 있다. <몽양 여운형 평전><우남 이승만 연구><한국전쟁><독도 1947><현 앨리스와 그의 시대><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한반도 관련 조항과 한국 정부의 대응> 등이 주요 저서다.


이처럼 무게 있는 책을 써낸 저자가 단지 행방 전후를 자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책을 냈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이 책의 부제를 '현대 한국의 원형'이라고 했듯이 이 책은 해방 이후, 특히 미 군정 시기에 한국의 원형이 주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미 군정의 개입과 이승만, 한민당의 협력 속에서 어떻게 지금의 한국이 형성됐는지 하는 얘기가 2장부터 4장까지 펼쳐진다. 2장의 제목은 '미군의 남한 진주와 알려지지 않은 막후 영향력 : 일본군·통역·윌리엄스의 역할', 3장의 제목은 '미 군정의 총독부·인공·임시정부 정책과 권력의 불하'다. 4장은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반탁운동과 그 귀결'이다. 제목에 '알려지지 않은'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새로 발견한 사료에 근거한 얘기가 많다. 새로 발견된 사실일 뿐 아니라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다.


"미국 문서와 이승만 문서가 공개되고 나서야 우리는 미로처럼 뒤엉켜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었던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 파동에 이르는 과정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404쪽)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는 해방정국의 내밀한 일을 알 수 있는 많은 비밀들이 나온다. 이제까지 해방 전후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이다.


2장에서는 조선총독부 영어 통역의 추천으로 미군 진주군 사령관 하지 장군의 통역이 된 이묘목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친일파이자 연희전문학교 출신으로 하지 장군에서 여운형 세력을 친일과 용공 세력으로 매도하고 주입하는 결정적인 노릇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친일과 용공은 양립할 수 없는 논리이지만, 한민당과 연계를 가진 이묘목은 하지에게 줄기차게 이런 논리를 주입했다. 물론 반공· 반소, 보수주의자인 하지의 입맛에 맞는 얘기였다. 


또 선교사 출신의 미국인들이 이묘목을 비롯한 친일 세력, 한민당 세력을 뒷받침하고 부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를 세운 프랭크 윌리엄스의 아들인 조지 윌리엄스다. 조선에 10여년 산 적이 있어 한국말도 구사하는 조지 윌리엄스는 해군 군의관으로 있다가 하지 장군이 진주할 때 함께 들어와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친일 기독교 보수 엘리트를 군정청 주변의 요직에 등용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군정 초기 조선총독부의 공작, 통역 및 선교사 권력의 개입이 주효하면서 해방 정국의 주도세력이 초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공에서 한민당 계열의 친일세력으로 넘어간다.


3장에서는 한민당 계열의 친일 세력이 미 군정 안에서 조직적으로 권력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 자세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당시에 기독교인은 인구의 약 3% 정도에 불과했는데, 미 군정 고위직 50명 중 35명, 즉 70%를 기독교 계열 인사가 차지했다. 한민당 선호, 인공 배제, 기독교 보수 인사 선호의 인사가 굳어졌다. 저자는 하지 장군은 진주 일주일 안에 친소 공산세력의 불신, 친일 한민당 신뢰, 중경 임시정부 활용이라는 세 가지 중대한 결정을 했고, 이런 기조 안에서 국내 친일 세력을 등용했다.


이를 통해 미 군정의 핵심 국가 권력기구인 고문회의(김성수, 송진우), 경찰(조병옥, 장택상), 사법부(김병로), 검찰(이인)이 모두 한민당의  손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한민당의 세상이 됐다. 중앙뿐 아니라 지방도 한민당 계열 또는 친일인사들의 세상이 됐는데, 해방 뒤 두 달 만에 이뤄진 한국인 관리 7만 5천명의 임명 과정에서 이런 일이 관철됐다. 모두 한민당 쪽 인사의 추천을 받아 미 군정이 등용한 데서 나온 결과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4장에 나온다. 하지는 진주 이후 조선의 미래에 관한 국제 합의인 신탁통치 안을 뒤집고 군정청이 주도하는 독자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것은 전승국인 미·영·중·소의 합의를 깨는 것뿐 아니라 미 국무부와 3부 위원회(국무부, 국방부, 해군부)의 지침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는 본국에서 조선 문제에 관심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성향대로 독자 정부 구성을 획책했다. 또한 이를 1945년 12월 16일에 열리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했다. 이런 차원에서 하지가 밀어붙이고 이승만과 한민당이 함께 획책한 것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이라는것이다. 


독촉중협은 하지-이승만-한민당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중경 임시정부가 참여를 거부하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여운형도 참가하지 않기로 하면서 틀어진다. 그런 와중에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신탁통치)가 나오기도 전에 '미국이 독립을 지지했으나 소련이 신탁을 주장했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면서 정국은 찬탁-반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하지만 저자인 정 교수는 반탁운동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미 군정과 이승만, 한민당의 핵심은 이미 알려지지 않은 공고한 반탁 동맹을 맺고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27일 <동아일보>의 오보가 나오기 하루 전인 26일에 강경한 반탁 성명을 낸 것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반탁운동을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를 앞두고 오래전부터 미 군정-이승만-한민당 3자가 손을 잡고 반탁-독립 정부를 추구해왔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인은 이 시기 미 군정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지 못했다. 미군 진주 이후 비밀스러운 3개월 동안 한국인들과 주한미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조건과 상황을 만들었다"면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이 책은 1945년 말로 멈추었으나,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면서 1946년 6월이 미 군정기 한국 현대사를 재편하는 중요한 대분기였다고 말했다. 그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집중 공격하고, 여운형을 회유하고, 김규식을 지지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는 것이다. 겉으로 국제적인 시선을 의식해 공산당을 배제하고 온건 좌파까지 아우르는 좌우합작 세력을 만드는 일을 했지만, 속으로는 이승만과 한민당과 미 군정의 기축적 동맹관계는 더욱 확고해졌다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정치자금의 측면만 보면, 미 군정은 이승만에게 1000만원, 김구에게 0원, 여운형에게 0원, 박헌영에게 -240만원(위폐 240만원을 찍어냈다는 이른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제공한 사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한반도에는 좌우, 남북, 미소라는 세 층위의 갈등과 압력이 중층적으로 쌓이고 있었다. <중략> 누구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혼돈 그 자체였고, 누구에게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행위 주체들에 따라 시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라는 말로 책을 끝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현대 한국의 원형'을 주조한 해방 직후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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