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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Jul 29. 2024

서평 : 문재인이 보는 '문 정권 외교정책'의 고갱이

회고록, 남북 정상회담, 최종건, 윤석열

학자들은 정치인의 회고록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연구서를 쓸 때 회고록 내용을 신문 보도보다도 잘 인용하지 않는 이유일 터다. 같은 사실의 기록이라고는 하자만 자기중심적인 내용일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정치인의 회고록이 전혀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특히, 높은 지위에서 중요한 정책을 집행했던 사람의 회고록일수록 가치가 크다. 대통령 회고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어떤 정책에 관해 깊은 얘기를 담은 대통령의 회고록은 거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낸 외교·안보 분야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김영사, 문재인 지음/최종건 대담, 2024년 5월)가 반가웠던 이유다. 이 책은 문 대통령이 직접 쓴 회고록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재인 정권 시절에 청와대 안보실 평화군비통제비서관, 평화기획비서관, 외교부 1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가 묻고 문 전 대통령이 답한 대담 기록이다. 


따라서 한계도 있다. 같은 편끼리 같은 정권이 아래서 추진한 외교·안보 정책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보니 아무리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해도 '초록은 동색'이란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후에 나온 <아베 회고록>도 문 전 대통령의 것처럼 대담 형식의 회고록이지만, 신문사 논설위원이 질문자로 참여한 점이 다르다. 문 전 대통령의 회고록도 '내부자 거래'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운 언론인이나 전문가가 대담으로 나섰으면 더욱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있다. 대담자인 최 교수의 변을 보면, 이 책은 원래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기획된 것이 아니다. 최 교수는 문 대통령이 지난해(2023년) 5월 어느 날 "외교 안보 분야 회고록을 써야겠으니, 나에게 대담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라고 털어놨다. 후임 윤석열 정권이  문 정권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을 마구 깎아내리고 그와 함께 일했던 외교·안보 분야 주역들을 재판에 부쳐 괴롭히고 있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에서 급하게 책을 내기로 한 것으로 짐작된다.


최 교수도 이런 한계를 의식한 듯 대담에 임하는 4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대담의 최종 소비자가 국민이라는 점, 둘째 대통령 얘기를 가감 없이 담는다는 점, 셋째, 대통령에게 때로는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점, 넷째, 이 책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현명한 독자들이라면, 내가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회고록 일반 및 이번 회고록이 가진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책을 읽으리라 본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이 쏠쏠하다.


우선,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많이 나온다. 


대담 첫 부분에서 문 전 대통령은, 정부 초기에 서훈 국정원장이 오랜 대북 접촉 경험을 살려서 국정원과 북한 통일전선부 간의 비공식 연락 채널을 만들었고, 이것이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이후 급박하게 전개된 남북 소통의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됐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문 정권 때 이뤄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그냥 성사된 것이 아니고 물밑에서 끊임없이 소통해온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첫 번째로 꼽은 곳이 판문점, 둘째가 몽골의 울란바토르였는데 미국이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심지어 2차 회담 때는 북한이 북한 해역에 미국 항공모함 같은 큰 배를 띄어놓고 선상 회담을 하자는 제안까지 내놨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뜻대로 1차, 2차 회담 장소가 싱가포르와 베트남으로 결정됐고 북한이 중국의 비행기를 빌려서 가거나 육로를 통해 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북한과 중국의 밀착이 이뤄질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인데, 1· 2차 모두 장소 선정에서 미국이 양보를 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설치된 남북 직통전화를 즉각 가동하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불편해하며 보안 우려가 있는 직통전화보다 이메일 통신 대화를 제안했고 서로 이메일 주소까지 서로 교환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는 얘기, 김 위원장이 북한의 폭격으로 주민이 숨진 바 있는 연평도에 위로 방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는 사실도 처음 나온 얘기다.


남북, 북미 관계 외에, 내가 가장 주목한 놀라운 사실은 미국이 한일 간의 최대 현안이었던 강제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참여하는 공동기금 해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시한 해법은 공동기금에 미국도 참여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좀 더 좋은 모양이 되고 피해자들을 설득하기가 수월해지죠. 우리도 체면이 더 서고, 일본도 그렇고요. 훌륭한 해법이어서 우리는 환영하지만 일본과 사전에 협의된 것이냐고, 그 해법을 제안한 커트 캠벨 인도태평양조정관(현 국무부 부장관)에게 물어봤더니 아직 일본하고는 협의는 안 됐지만 우리만 오케이 하면 일본이야 금방 설득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일본은 그 제안도 거절했어요."(602쪽) 


문 전 대통령이 이런 비화를 밝히면서, 조금만 더 참았으면 일본에 그렇게 굴욕적으로 항복하는 외교를 하지 않았어도 되는데 하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방안이 과연 좋은 해결책인지에 관해 의문이 들었다. 강제노동 문제는 한일 양국의 문제 그중에서도 일본의 문제가 핵심인데, 제3자인 미국이 기금에 참여하는 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꼼수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에서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원료 수출 통제 조치와 관련한 비화도 나온다. 이때 문 정부가 크게 당황하지 않고 일본의 기습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영민 당시 주중 대사와 문정인 교수가 각각 일본 쪽 인사로부터 미리 그런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해 보고해 줬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정부와 기업 등 관계자들과 철저하게 대비를 했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한국의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을 강화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정확한 정보와 판단, 대비가 국가 운영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대목을 읽으면서 다시금 실감했다. 


이 책에서 문 전 대통령은 "어떤 구상으로 한반도 프로세스를 추진했으며, 어떤 마음  자세로 외교·국방·보훈·방산 정책을 다루었는지'에 관해서도 소상하게 밝혔다. 이런 분야의 정책에 관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직접 읽어 보길 바란다. 650여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대담 형식이어서 술술 잘 넘어간다.  


윤석열 정권 관계자들은 이 책의 일부 지엽말단, 예를 들어 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의 인도 방문 건만 끄집어 내어 김씨의 자청 방문이 아닌지 그때 기내식이 호화인지 아닌지 하는 수준 낮은 논란을 제기하는 데만 골몰했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고 문제를 삼는 근시안적 사고와 치졸함의 극치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한테서도 얼마든지 교훈이 될 만한 일을 발견할 수 있는데 말이다. 하물며 전 정권의 수장이 쓴 글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까? 낭비적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문재인 회고록 : 외교·안보 편'이다. 앞으로 다른 편도 내놓겠다는 신호로 보인다. 그때는 이번보다 더욱 충실하고 객관적인 회고록이 나왔으면 좋겠다.

      

[출처] 서평 182 : 문재인이 말하는 '문 정권 외교·안보 정책'의 고갱이 <변방에서 중심으로>|작성자 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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