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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Oct 31. 2021

공관장으로 내가 하지 않은 '2+1'

오사카총영사 시절 이애기


오사카총영사로 부임을 하면서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각종 향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외 동포들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같은 고향 출신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유대를 다지는 경향이 강하다. 국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사카에만도 경남도민회, 제주도민회, 경북도민회, 전남도민회, 전북도민회, 충청도민회, 경기도민회 등이 있다.


오사카에는 특히 제주도 출신 동포들이 많다. 1923년부터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연락선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많은 제주출신 동포들이 오사카에 뿌리를 내렸다. 당시 오사카는 '동양의 맨체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공업이 발전했고, 제주도는 가난했기 때문에 많은 동포들이 돈을 벌러 건너왔다. 이들이 집단을 이뤄 사는 곳이 지금의 이쿠노 코리아타운 부근(옛 이름, 이카이노)이다. 여기에 4.3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관련자 및 가족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오사카에는 제주 출신 동포들이 가장 많다는 얘기도 있지만, 실제로는 경남 출신이 더 많다. 다른 지역에 비해 오사카에 제주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절대적 숫자로는 경남 출신이 제일 많다.


신년회나 송년회 철이 돌아오면, 이들 향우회들이 송년 또는 신년모임을 하면서 공관장을 초청한다. 행사 날이 중복되면 겹치기 출연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공관장이 참석하면 모임이 '빛'이 나고, 공관장은 동포들의 '청'을 무시하면 불평을 듣기 쉬우니까 이런 관행이 이어져왔을 것이다.


나는 동포 전체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공관장이, 향우회에 참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모든 향우회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어렵고, 이런 과정에서 불공평 논란이 벌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 공관장으로서 지연이나 1차집단에 얽매이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같은 고향 출신 총영사가 왔다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누구보다 서운해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초청을 받고 마냥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내가 가지 않는 이유를 정중하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향우회 행사라도 국내에서 해당 지역의 도지사가 오거나 향우회에서 의미 있는 행사를 할 경우에는 참석했다. 그것은 공관장으로서 해야 할 공적인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학교 동창회 모임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학연 의식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동창회도 공관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불편부당' '공정'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임의 주최 쪽으로부터 몇 차례 모임 소식을 전해 받았지만, 이런 사정을 설명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다행히 주최 쪽도 무슨 말인지 금세 이해해 주었다.


향우회와 학교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 나의 의도였지만, 의도적이 아니면서 하지 않은 것도 하나 있다. 골프다. 공관장의 골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공사를 잘 가려서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부임 전에 거금을 들여 가방도 새로 장만했다. 하지만 부임하자마자 몸에 탈이 생겼다. 초반 몇 개월은 손목 터널증후군이 나타나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다음 몇 개월은 오견이 나타나면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기간이 이어졌다. 이러다 보니까, 자연히 골프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처음부터 골프를 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골프를 하지 않았다.


오사카는 동포들의 주요 행사가 주로 주말에 열린다. 평일에는 생업에 매달리느라 행사에 참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골프를 하기 시작했다면 주말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하는 고민을 했을 터인데, 그런 고민 없이 행사 쪽을 선택하게 됐다. 자연히 동포나 지역 사회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덤으로 '총영사는 누구랑만 골프를 친다'는 전형적인 험담도 피할 수 있었다.


공관마다 각기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내가 했던 선택이 일률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경우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2+1'의 선택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잃은 것도 있었겠지만, 잃었기 때문에 얻은 것도 그 이상으로 많았다. 얻은 것 중의 하나가, 재임 중에 일본어로 <총영사 일기>를 출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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