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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Sep 25. 2024

<시사 칼럼> 번지수 잘못 찾은 '체코 원전 수출' 꿈

윤석열, 체코, 원전 동맹, 일본제철, 유에스스틸

일본의 최대 제철 회사인 일본제철이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US스틸을 매수하려는 꿈이 무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일본제철은 지난해 12월, US스틸을 약 140억 달러(약 18조 7천억원)에 매수하기로 하고 인수 절차를 착착 밟아왔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제계에서도 양국 경제에 서로 도움이 된다며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인수 절차에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바로 11월 5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 순항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물론 일본제철도 대선 변수에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올 1월에 인수 저지 의사를 밝힌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선거전에서 점점 우세를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자, 7월에 갑자기 1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를 고문으로 영입했습니다. 의사결정이 늦기로 유명한 일본기업으로선 매우 발 빠른 대응이었습니다. 문제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새로 민주당 후보가 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태도도 공화당과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대선 바람에 제동 걸린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꿈    

 

민주·공화 양당이 모두 반대하는 근본 원인은, US스틸의 소재지가 미국 대선의 향방을 쥐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주라는 점입니다. 이전 두 차례의 선거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 이긴 후보가 모두 대통령에 당선했습니다. 그만큼 펜실베이니아주는 미 대선을 좌우하는 7개 경합 주에서도 가장 요지입니다. 경합 주 가운데 선거인단 수도 19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미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쇠락한 공업지대의 좌절한 노동자 표를 끌어모으는 게 관건인데, 이곳이 바로 노동자들의 표심을 좌지우지하는 상징 지역입니다. 그래서 공화·민주 어느 당도도 감히 US스틸의 일본제철 매각을 반대하는 노동자의 심기를 거슬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자칫 이곳의 분위기가 또 다른 경합 주이자 쇠락 공업지대인 미시간주와 위스콘신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도 이미 3월에 매각 반대 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9월 초엔 그가 ‘안전 보장상의 이유’로 아예 인수 중지 명령을 내린다는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그러자 일본제철뿐 아니라 일본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일본제철 회장이 직접 바이든 대통령에게 ‘적절한 판단’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한국의 전경련과 같은 일본의 대기업 연합 단체인 게이단렌이 ‘공정한 심사’를 촉구하는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제철과 일본 경제계의 맹렬한 로비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제철의 인수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대미외국투자위원회(위원장, 재닛 옐런 재무장관)가 최근, 9월 23일까지였던 심사 기한을 3개월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대선 이후로 최종 결정을 연기하겠다는 건데, 일본 미디어들도 그렇게 한다 해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어렵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한 번 뱉어놓은 반대 의사를 번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죠.


일본제철 사례가 윤 정권의 원전 수출 주친에 주는 교훈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파동은, 윤석열 정권의 체코 ‘원전 수출’ 추진에도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미국은 아무리 가까운 동맹국이라도 자신의 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절대 봐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을 중요도 순으로 줄 세운다면, 대서양의 영국과 함께 태평양의 일본이 맨 앞을 다투고 한국은 일본보다 여러모로 뒷줄이라는 건 국제사회의 상식입니다. 이번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는 제1급 동맹국이라도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하물며 동맹 순위에서 일본보다 한참 뒤로 밀리는 한국엔 어떻겠습니까. 이런 미국의 태도는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둘째, 미국 지도자들의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는 당장 코앞에 있는 대선 승리라는 점입니다. 공화·민주 양당은 지금 한창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선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선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미국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와 극단적 대결 분위기가 쉽게 식지 않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만일 US스틸이 최대의 경합 주이자 쇠락한 산업지대인 펜실베이니아에 있지 않았다면, 미국 양당이 모두 양국의 경제계가 환영하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반대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일본제철의 인수가 무산된다면, 전적으로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의 최저 지지율을 안고 추석 연휴 뒤인 19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체코 국빈 방문을 마치고, 22일 귀국했습니다. ‘팀 코리아’, ‘원전 동맹’ ‘원전 르네상스’ 등의 뜬금없고 과장된 조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전 수출만을 위한 ‘목적타 방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덤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는 정치적 속셈도 있었겠죠.    

 

체코 원전 수출 꿈 아닌 어음으로 드러나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체코 방문 직전 다 성사된 것처럼 떠벌였던 체코 원전 수출이 현찰이 아니라 어음이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윤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엇갈린 말이 이런 실상을 잘 보여줬습니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의 지식 재산권 분쟁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먼저 윤 대통령이 “양국(한-미) 정부는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고, 우리 정부도 한·미 기업 간 원만한 문제 해결을 지원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때처럼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파벨 대통령이 이어 “최종 계약이 체결되기 전 확실한 건 없다. 분쟁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이로운 것이고, 오래 끌지 않고 합의를 보는 것이 양쪽에 유리하다. 이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나쁜 시나리오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체코 대통령의 말에서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면 한국과 미국 사이의 분쟁 해결이 선결 과제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일본제철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윤 대통령의 발언이 얼마나 순진하고 현실성이 없는지 드러납니다. 우선, 한-미 두 나라가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는 것과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지식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워싱턴선언’에서, 원자력 분야의 ‘지식 재산권 존중’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덥석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윤 정권이 아무리 동맹을 강조하고 미국을 짝사랑해도, 미국은 그런 것에 눈도 끔쩍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냉엄한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한 언행입니다. 일본제철은 지식 재산권 분쟁도 없고 도리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미-일 양국 경제계의 의견이 쇄도하는데도, 집중적인 견제와 냉대를 받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US스틸과 웨스팅하우스 모두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주 소재 기업 

     

두 정상의 발언으로 볼 때, 윤 대통령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셨습니다. 원전 수출을 매듭지으려면 체코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미국(웨스팅하우스)과 지식 재산권 분쟁부터 확실하게 타결해야 했습니다. 장관급에서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미국으로 달려가 풀겠다는 결기라도 보였어야 했습니다. 미국과 분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 된 밥’인 것처럼 체코로 달려간 것은 번지수를 잘 못 찾은 헛된 방문이었습니다. 원전 수출이라는 허황된 꿈에 취해, 지지율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바늘허리에 실을 매고 달려든 꼴이 됐습니다.     


일본제철 사례와 비교하는 김에 한수원에 지재권 소송을 제기한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어느 곳에 있는 기업인지 찾아봤습니다. 우연하게도 일본제철이 인수하려는 US스틸과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원은 9천명이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때 가전제품도 생산하고 방위산업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현재는 원자력 전문기업으로 변신했습니다. 쇠락한 제조업인 제철 회사와 사정은 좀 다르겠지만 같은 펜실베이니아 소재 기업이라는 점에서 다른 곳보다 보호주의 정치 바람을 강하게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말 네덜란드 방문 때 ‘반도체 동맹’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회사 에이에스엠엘(ASML)은 최첨단 노광장비를 삼성전자가 아닌 미국의 인텔에 맨 먼저 납품했습니다. 한국과 체코의 ‘원전 동맹’도, 말만 요란할 뿐 전혀 실속이 없었던 네덜란드와 반도체 동맹 짝이 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윤 대통령의 체코 방문을 보면서 역시 ‘잘하는 외교’는 화려한 백 번의 말이 아니라 한 번의 확실한 실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합니다. 

https://omn.kr/2aa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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