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외교, 대전락, 트럼프, 해리스
'미국이 기침을 하면 일본이 감기에 걸리고, 한국은 몸살을 앓는다.' 수십 년 전 한국 경제의 미존 의존성을 얘기할 때, 자주 듣던 말이다. 지금은 한국도 세계 10대 무역 강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미국이 기침을 한다고 몸살을 앓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한국 경제에 끼치는 미국의 영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시야를 경제가 아니라 외교 안보 쪽으로 돌리면, '미국의 기침-한국의 몸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정도가 훨씬 심하다. 사대주의 성향이 강한 정권일수록 미국의 정책을 마치 한국의 것인 양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의존성이 아니라 일체성을 보인다. 역대 어느 정권보다 친미·친일 사대주의 성향이 강한 윤석열 정권의 외교 안보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도 미국 외교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나가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걸 전적으로 추수하는 나라는 더욱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자국 중심성'을 잃고 힘센 나라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나라의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이다.
<미국 외교의 대전략>(김앤김북스, 스티븐 M. 월트 지음, 김성훈 옮김, 2021년 8월)은 옛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미국 외교의 대전략이 된 '자유주의 패권 외교'가 왜 길을 잃었는지 설명하고, 더 나은 전략이 없는지를 살펴 본 책이다.
저자는 하버드대학 존 F. 케네디스쿨 학술처장으로, 대표적인 현실주의 이론 학자 중 한 명이다. 역자는 현직 외교부 관리다. 외교부 관리가 외교 정책과 관련한 책을 번역했기 때문인지 번역의 질이 좋다. 책을 쓸 당시와 달라진 내용이나 인물의 직위, 전문 용어를 친절하게 '역자 주'로 설명해 준 세심함이 돋보인다.
미국은 냉전이 붕괴한 1990년대 초부터 미국이 지향하는 모습대로 세계를 개조하려는 전략을 채택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냉전 시대 경쟁자였던 옛 소련의 붕괴로 유일 최강국이 된 뒤 자유주의에 진정으로 부합하는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목표 아래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그리고 자유주의 원칙들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구사하는 데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차이가 없었다. 절제되고 부드러운 민주당 식이냐, 근육질의 우왁스러운 공화당 식이냐 하는 방법상의 차이만 있었지 세계를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로 바꿔놓겠다는 목표는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한 2016년까지 돌아볼 때 냉전 종식 뒤 20여 년간 추구해왔던 미국의 이런 전략은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실패한 이유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해당 국들의 반발을 과소평가하는 등 국제정치에 관한 왜곡된 이해에 근거했다는 점을 주요하게 꼽았다.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을 펴는 학자의 시각이 잘 담겨 있는 주장이다.
그는 1993년과 2016년 사이에 미국의 전략적 지위가 급격하게 하락한 점을 보면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대부분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이 안보 공약을 멀리 광범위하게 확대했지만 유럽, 아시아, 중동이 더 평화로워지지도 않았고, 몇몇 경우에는 발생하지 않아도 됐을 전쟁을 초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실패 사례에는 우크라이나 전쟁도 포함된다.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패권 전략은 지금도 매우 강고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른바 외교 정책 생산과 집행의 기득권 세력인 '외교 정책 커뮤니티'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제 문제 이슈에 정기적이고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개인과 기관을 '외교정책 커뮤니티'라고 정의했는데, 여기에는 국무성과 국방부, 중앙정보국, 군 등의 정부 기관, 싱크탱크, 이익단체 및 로비단체, 언론매체, 학계 등이 두루 포함된다. 이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견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고 바라는 정책만이 살아남는다.
저자는 이런 기득권 집단을 '블롭(한 줌의 물방울이란 뜻)' 또는 '벨트웨이(워싱턴을 감싸는 순환도로)'라고 부른다. 블롭이나 벨트웨이에 끼지 못하면 미국 외교 정책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규모는 작지만 한국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다. 얼마 되지 않는 외교 안보 분야의 기득권 세력이 똘똘 뭉쳐 정책뿐 아니라 자리까지 독점한다. 특히, 윤석열 정권 들어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심해졌다.
저자는 이들이 자유주의 패권의 생존을 위해, 위협을 부풀리고, 이득을 과장하고, 비용을 은폐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구사한다고 까발린다. 정책이 실패하고 문제가 불거져도 전혀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승진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기득권 세력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막아주는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을 때 실패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수정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트럼프가 '미국 외교정책에서 녹을 덜어내겠다'라고 공언했는데, 이것은 실패를 반복해온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수정하길 바라는 일반 국민의 정서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정권 교체를 이루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말로만 기존 관습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흐름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돌출 언행으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단결을 불러일으키면서 고립을 자초했다. 저자는 심지어 트럼프의 방식을 '미국 외교 정책을 어떤 식으로 고쳐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교과서 같은 본보기'라고 혹평했다.
저자는 미국이 실패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버리고, 역외 균형 전략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역외 균형 전략은 '개선된 고립주의 전략', 또는 '절제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가 말하는 역외 균형 정책은 '미국이 지향하는 모습에 맞춰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세력 균형에서 미국의 위치에 관심을 두면서 다른 나라가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방식으로 힘을 투사하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을 두는 전략이다. 미국의 사활이 걸린 이익이 직접 위협받을 때에만 해외에서 힘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토의 동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개입, 중국에 대한 과도한 봉쇄는 모두 잘못된 전략이다.
저자가 책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 기득권 세력은 아직도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나 해리스 누가 대통령이 돼도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그대로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국의 시민들은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자유주의 전도사처럼 사사건건 나서는 것에 저항감도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외교 기득권 세력보다 유권자의 뜻을 중시한다면, 미국 외교의 대전략을 자유주의 패권에서 역외 균형으로 바꿀 가능성이 완전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시 한국의 문제다. '군자표변'이라는 말이 있듯이 강대국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럼없이 정책을 급선회할 수 있다. 1970년 대 일어난 갑작스러운 미중 화해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미국의 급선회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미국 하는 것이면 무조건 좋다는 자세로 추수하다가는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수 있는 게 한국의 처지다. 이 책을 보면서 이 점이 가장 우려스럽고 걱정됐다.
이 책의 원제는 'The Hell of Good Intentions-America's Foriegn Elite and the Decline of U.S Primacy'다. 제목에서 이 책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선한 의도가 '자유주의 패권 전략'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