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사진 조작, 여론 조작, 백악관, 강형원
윤석열 정권 들어 대통령 부부와 관련한 보도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신문 지면에 ‘대통령실 제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사진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10월 21일 면담인지 독대인지 했던 장면을 전하는 사진 뉴스를 봅시다. 모두 대통령실이 찍어서 제공한 것들입니다. 무슨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대한 국가안보가 걸린 사안도 아닌데 사진기자의 현장 취재를 원천 봉쇄한 것은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하 서열 관계를 강조한 의도적인 사진
더구나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최대의 국민적 관심사였습니다. 이른바 ‘김건희 추문’과 그에 대한 대책이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로서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날 장면을 대통령실 전속 사진사가 찍어 배포한 사진을 보면. 사진기자의 접근을 봉쇄한 대통령실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실이 제공한 대표적인 사진은 윤 대통령이 긴 탁자의 반대편에 한 대표와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함께 앉혀놓고 훈계하는 듯한 모습을 담았습니다. 누가 이 사진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대통령실은 이 사진을 통해 윤 대통령과 한 대표는 동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겁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한 대표에게는 서열 관계가 이러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라고 다그치고 국민에게는 무소불위한 대통령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신호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윤 대통령은 사진이 예고한 대로 움직였습니다. 한 대표와 만남은 제로 콜라로 때우더니 바로 그날 저녁에 추경호 국힘 원내대표를 바로 불러 음식 대접을 했습니다. 다음 날엔 부산의 범어사를 방문해 “돌을 던지더라도 맞고 가겠다”라고 호기를 부렸습니다. 이어 초량시장을 방문해 시장 상인 및 손님들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누가 뭐라든 나는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날 신문에 나온 부산 방문 사진들도 모두 대통령실 제공이었습니다.
퓰리처상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언론상입니다. 강형원 기자는 보도사진 부문에서 두 차례나 퓰리처상을 탄 재미동포 언론인입니다. <엘에이타임스>에 근무하던 1993년에 ‘코리아타운 흑인 폭동’ 취재 보도로 첫 퓰리처상을 탔고, <에이피(AP) 통신>에 근무하던 1999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추문 사건 보도로 두 번째 수상자가 됐습니다. 그 뒤 백악관 전속 사진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백악관의 사진 보도 관행에 밝습니다.
관청 제공 사진은 선전·홍보의 도구
강 기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미국 언론에서는 백악관 전속 사진사가 찍어서 배포하는 사진은 특별한 예외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진이라고 해도 그건 뉴스가 아니라 선전이고 홍보이기 때문입니다.” 관청에서 제공하는 사진을 쓰지 않는 것은, 연출된 사진을 보도사진으로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강 기자는 미국 언론이 백악관 제공 사진을 썼던 예외적 상황으로, 2011년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작전실에서 빈 라덴 사살 장면을 지켜봤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었습니다. 그 정도의 극비 사항이 아니라면 백악관 제공 사진을 받아 쓰지 않는다는 얘기죠. 또 그는 미국 대통령이 차량 행렬로 이동할 때 사진기자들은 언제든지 대통령의 움직임을 바로 취재할 수 있도록 앞에서 5번째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백악관 쪽이 원래부터 사진기자의 편의를 배려해 준 것이 아니라 기자들이 요구해서 얻어낸 전통이라는 겁니다.
한국의 대통령 관련 사진 보도도 원래부터 ‘대통령실 제공’으로 범벅이 된 게 아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후 청와대에 출입했던 사진기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민주화된 뒤에는 미국 백악관 취재 방식에 거의 근접해 갔습니다. 극소수의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의 거의 모든 일정을 공유하고 취재했습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하루 최대 21번이나 청와대 출입 사진기자가 조를 편성해 취재에 나선 적도 있다고 합니다.
상황은 윤석열 정권 들어 급변했습니다. 사진 취재가 허용되는 일정이 팍 줄어들고 대통령실 전속 사진사가 찍어서 던져주는 관행이 일상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 기자의 말대로라면,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실 아래서는 보도는 사라지고 선전과 홍보만 난무하게 된 겁니다.
대통령실이 국민이 알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을 가리고, 자신들이 알려주고 싶은 것과 보여주고 싶은 것만 제공하는 것은 언론 통제이고 여론 조작입니다.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선전·홍보 수법입니다.
여론 조작을 막을 책임은 기자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실의 전횡만 탓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실에 출입하는, 이른바 ‘1호 기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들이 대통령실이 찍고 누가 골라서 주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저항 없이 받아쓰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실의 여론 조작에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이 동조하고 가담하는 것입니다.
윤 정권의 대통령실에 출입하는 한 사진 기자는 말합니다. “개별적으로 불만도 제기하고 비판도 했지만 막무가내”라고요. 그렇다고 집단으로 항의하는 건 각 회사의 의견이 어긋나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국민은 무방비로 여론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더욱 심각한 건 이런 여론 조작이 사진 보도 분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취재 보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 보도에서 ‘대통령실 제공’이 하는 역할을, 기사 취재에서는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이 하고 있습니다. 서면 브리핑은 기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생생한 문답을 피하고, 대통령실이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전하려는 꼼수입니다.
이제 대통령실 기자들의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대통령실이 취재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보이콧을 하면 됩니다. 만약 한국의 모든 언론사가 대통령실 홍보 사진을 쓰지 않고, 그 자리에 텅 빈 공백을 남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강 기자가 내놓은 해법입니다.
마침 10월 24일은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과 장악 기도에 맞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맞짱 뜬 <동아일보> 기자들의 투쟁에 백지 광고로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습니다. 윤 정권에서 그때의 재현을 꿈꾸는 건 저만의 몽상일까요?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