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 일본을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일본통들'

재팬핸들러즈, 미일관계. 종속, 불평등, 한미관계

by 오태규

2차대전 이후의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대미 종속과 불평등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핵심에는 일본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이 일본을 지켜주는 미일 안보조약이 있다. 1961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눈에 띄는 불평등 내용을 다소 완화하는 방향으로 신미일 안보조약을 맺었지만, '불평등-편무성' 조약이란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소장 정치학자인 시라이 사토시 교토세이카대학 교수는 <영속 패전론> 등의 저서를 통해, 2차대전 전에 천황이 하던 상전 노릇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대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대신 일본으로 하여금 동아시아를 패전 이전처럼 장악하도록 용인하고 있는 체제가 지금의 미일 동맹 체제라는 얘기다.

불평등한 미일 안보조약이 미일 종속관계의 밑바탕이 되고 있지만, 종속관계의 작동은 매우 다양하고 교묘한 방법을 통해 이뤄진다. 구조적으로 종속관계이지만 일반 일본 시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조지프 나이의 표현을 빌리면, 소프트파워를 통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팬 핸들러즈>(일본문예사, 나카타 야스히코 지음, 2005년 5월)는 일본을 조종하는 미국의 정치인·관료·지식인이 누구이며, 그들이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상세하게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대일 전략을 연구하고 수립하는 대학·싱크탱크·정부기관의 전모를 공개하고, 그들이 일본을 조종하는 수법을 철저하게 해부한다. 미국 쪽의 조종자와 일본 쪽의 협력자 등 197명의 실명이 그대로 나온다.

이 책은 일본의 대미 종속을 조종하는 구조와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대미 종속으로 말하자면,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요즘에는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얼마 전만 해도 일본을 조종하는 사람과 조직이 한국도 함께 '부업'으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미국의 대일정책은 소련 붕괴(1991년)의 전과 후로 크게 나뉜다고 말한다. 소련 붕괴 전에는 일본을 반공전 선의 방파제로 내세웠으나, 붕괴 후에는 경제 패권을 다투는 경쟁국 또는 적국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배경이다. 이 책은 2005년까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2011년 중국의 급부상 이후 일본을 다시 중국 견제의 선봉으로 내세우는 전략까지는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미일관계를 정확하게 진단하지는 못하는 한계가 있다.

저자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대일정책과 달라졌다는 관점에서 재팬 핸들러를 5세대로 분류한다. 제1세대는 전전에 일본에서 출생해 문화적으로 일본에 관심을 가진 세대, 즉 에드워드 라이샤워 전 주일대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제2세대는 2차대전에 참전해 싸웠고, 점령 당국에서 일하면서 일본에 흥미를 가지게 된 윌리엄 샤먼 같은 외교관이다. 제3세대는 일본이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이전에 일본을 연구한 다니엘 세이어 등이다. 제4세대는 일본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1970년대 이후의 연구자로, 제임스 파로즈, 켄트 카루다 등이 꼽힌다. 제5세대는 일본이 경제대국이 된 80년 이후 일본에 살면서 연구한 사람들, 즉 마이클 그린 같은 사람들이다. 저자의 분류에 따르면, 제4, 5세대가 소련 붕괴 뒤 활약하기 시작한 세대다.

저자는 3장(미국의 대학, 싱크탱크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재팬 핸들러즈)에서 대학과 싱크탱크, 그리고 거기에서 일하는 재팬 핸들러즈의 면면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동부의 대학과 싱크탱크는 전통형으로 문화적 측면, 경제 측면의 연구가 강하다. 반면, 서부의 대학과 싱크탱크는 신흥형으로 군수산업과 하이테크와 관련한 연구가 왕성하다. 대학 별, 싱크탱크 별 구체적인 분석에 흥미 있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직접 구해 읽어보길 바란다. 아쉽게도 아직 한글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제3세대의 대표로 활약했던 콜롬비아대학의 제럴드 커티스 교수 얘기가 나오는데, 그는 지금 박철희 주일 대사의 스승이다. 커티스 교수를 일본에서 유명하게 만든 책이 <대의사의 탄생>이다. 이 책에서 커티스 교수는 나카소네파 의원의 선거운동을 직접 따라다니면 일본의 의원이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박 대사도 스승인 커티스의 수법을 그대로 흉내 내어, <대의사가 만들어지는 법-소선구의 선거전략>이란 책을 쓰면서 일본에서 주목을 받게 됐다.

이 책은 단지 대일정책을 조종하는 미국 쪽 사람들 얘기만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들과 2인 3각이 되어 그들의 조정에 협조하는 일본 쪽 사람들 얘기도 나온다. 나는 이런 내용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이다. 2004년을 경계로 일본 쪽의 카운터파트가 크게 바뀌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와타나베 쓰네오 전 <요미우리신문> 회장 중심의 구세력이 지고 미야우치 요시히코 오릭스 회장-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다케나카 헤이조 게이오대 교수 중심의 신세력이 떠올랐다. 나카소네 등은 헨리 키신저 등과 네트워크를 맺고 있던 전통 우파인데, 이것이 2004년 세계화 추세와 함께 금융 IT 분야와 글로벌리스트인 미야우치 등으로 친미 카우터파트의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록펠러 가문이 일본에 매우 공을 들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미국에서 유럽의 왕족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록펠러 가문은, 일본을 '미·일·유럽 3극위원회' 멤버로 끌어들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급성장하는 일본을 끌어들여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노림수였을 것으로 저자는 풀이한다. 록펠러 가문은 1907년 당시 미국과 일본의 교류 창구로 만들어졌던 저팬소사이어티를 전후에 부활시켰고, 1956년에는 아시아소사이어티를 주도적으로 설립했다. 이런 것을 통해 재계를 위시한 일본의 상층부와 록펠러 가눔의 연계가 상상 이상으로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저자는 "미국의 재팬 핸들러즈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고 일본의 차기 국가전략을 세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에도 그대로 그대로 맞는 얘기다. 미국의 '코리아 핸들러즈'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미래 전략을 세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에는 미국의 '코리아 핸들러즈'를 규명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 지금 한국을 움직이는 미국의 '코리아 핸들러는 어떤 사람들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맴돌았던 질문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책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사원장 출신 보수 법률가 최재형도 '윤석열 탄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