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태규 Nov 07. 2021

관료사회의 나쁜 풍조, '관례 중시' 문화

오사카총영사 시절 이야기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2020년 9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배턴을 이어받을 때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다. 그러나 코로나 대책의 미숙과 무파벌의 한계를 드러내며 1년 만에 초라한 퇴장을 했다. 사실상 모든 파벌의 지지를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때와 달리, 마지막에는 쳐다보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냉대를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 정치세계의 냉혹함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찾기 힘들 것이다.


 스가 당시 관방장관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한 뒤 연 첫 기자회견에서 '나쁜 전례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관공서의 수직적 관계나 기득권익, 나쁜 전례주의를 타파해 규제개혁을 진행시켜나가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례주의는 내가 가장 공감했던 단어다. 그가 관료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니, 일본 공직사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다는 기대도 했었다.


'나쁜 전례주의'라는 것은 곧 '나쁜 관례주의'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데, 나도 특임공관장으로서 일을 하면서 관료사회의 '관례 지상주의'가 새로운 일을 하는 데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때대로 느꼈다. 일반적으로 관료들은 누가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건 관례에 맞지 않다"거나 "이제까지는 그렇게 해오지 않았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한다. 새롭게 하려는 일이 지금의 상황에 맞는 것인지, 법령에 어긋남은 없는지를 살펴보기도 전에 '관례'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경향이 있다.


고위직이든 하위직이든 가리지 않고 관료들이 관례를 중시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가장 편리하게 동원할 수 있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관례는 이제까지 일을 해오면서 축적돼온 것이므로 나름 합리적인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쉽게 새 일에 대한  반박논리로 꺼내들 수 있다. 둘째, 관례는 위험 부담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보신책이다. 새로운 일에는 위험 부담이 따르니 관례라는 방패 뒤에 숨고 싶은 것이다. 셋째, 게으름을 감추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하려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해야 하는데, 관례는 게으름을 감추면서 새 일을 하지 않는 좋은 명분이 된다.


나는 공관 일을 하면서 '관례주의'의 움직임이 나올 때,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득하거나 반박하며 일을 추진했다.


 "관례는 어떤 일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관례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시대변화나 환경의 변화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관례가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인간사회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앞의 전례를 100%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례를 답습만 하자는 것은 점차 퇴보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세상은 서 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그에 뒤쳐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보다 몇 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관에서 관례를 중시하는 나쁜 풍조는 법령, 규정집보다도 다른 공관의 예를 중시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판단이 애매한 일이 생기거나 새로운 상황에  부딪힐 때는 법령과 규정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보다 먼저 다른 공관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고 한다. 법이야 어떻게 규정돼 있든 "빨간 신호등도 함께 건너면  안전하다"는 심리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판단의 기준점이 '법'이 아니고 '옆 공관'이 되다 보니, 아무리 새 시대에 맞는 법이 제정돼도 낡은 관행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문화가 오랫동안 형성돼왔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쉽게 고쳐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공관 직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발견하고, 내 문제의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관습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따르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또 루이스 캐롤의 소설 <거울 공화국의 앨리스>에 나오는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전력으로 달려야 한다"는 붉은 여왕의 말도, 비슷한 문제의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