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민동, 광주항쟁, 국회앞, 민주동문회, 비상계엄
2024년 12월 3일과 2025년 4월 4일은, 앞으로 대한국민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앞 날은 폭군 윤석열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날이고, 뒤 날은 그가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된 날이다.
날짜만 건성으로 보면, 윤석열이 쉽게 파면된 것 같다. 하지만 처음과 끝 사이의 4개월은 매우 긴박하고 치열한 나날이었다. 윤석열 일당은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와 탄핵 소추에도 불구하고 온갖 수단을 쓰면서 저항했다. 시민들이 온몸을 던져 맞서 싸우지 않았다면 내란 세력이 지금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활보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윤석열 내란 진압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국회의원들의 신속한 계엄 해제 결의, 일부 여당 의원들의 탄핵 소추 가담, 군인들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민주 시민의 저항이었음을 말할 나위 없다. 헌재의 판결문이 말한 대로 '시민의 저항 덕분'이 절대적이었다.
<땅에 내린 별, 내란을 넘다>(쑬딴스북, 강민서 등 22명 지음, 2025년 4월 3일)는 윤석열 내란 이후 광장에서 시민들이 벌인 저항을 참가자의 눈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책이 출간된 날이 헌재에서 파면 선고가 나기 바로 하루 전이다. 모르면 몰라도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투쟁을 최초로 보고한 책일 것이다.
이 책은 외국어대 민주동문회(외민동)에 소속한 22명의 회원이 '탄핵 광장'에 참여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1편씩 써서 묶은 것이다. 20대부터 7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필자가 참여했다. 직업도 교수, 비정규 노동자, 자영업자, 기자 등 다양하다. 그만큼 나이별, 직업별로 내란 사태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광주항쟁을 경험한 연장자들은 계엄령 발표 뉴스를 보자마자 광주의 기억을 소환하며 국회로 달려가거나 두려움에 휩싸였다. 젊은 층은 21세기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계엄령이 벌어진 걸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 분노했다. 그런 감정과 힘이 모두 하나로 모여 윤석열 파면의 원동력이 됐다.
이 책이 윤석열의 파면과 동시에 기동력 있게 나온 것은 외민동의 단단한 조직력과 활동력 덕분이다. 나도 광장에 나갈 때마다 옅은 초록색의 외민동 깃발과 그 깃발 주위에 모여 있는 일군의 무리를 목격하곤 했다. 그들을 보면서 여러 대학의 민주동우회 중에서도 유별나다는 느낌을 가졌다. 역시 이런 결속과 활력이 있었기에 원고 모집과 편집, 디자인, 출판, 인쇄라는 복잡한 과정을 쉽게 돌파하고 신속하게 결과물을 내놓았을 것이다.
이 책 저자들은 모두 광장에 적극 참가한 열렬한 민주 시민들이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의 감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광장에 참가한 열렬 시민들의 생각이 어떠했고, 열렬 시민들 중에서도 나이별 직업별로 어떻게 생각과 관점이 다른지 비교해 볼 수 있다. 읽는 사람이 현장에 직접 참석한 것처럼 임장감을 제공하고 있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책에는 탄핵 소추안 통과 때의 국회 앞 광장,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전봉준 투쟁단이 활약했던 남태령 고개, 윤석열 체포를 촉구했던 한남동이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내란 진압 과정의 3대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국회 앞 광장에서는 케이팝과 응원봉으로 무장한 젊은 층이 노인네와 결합하는 모습이 처음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눈에 포착됐다. 필자들도 이런 점을 주목하며 황홀해했다. 낡음과 새로움, 운동가와 케이팝, 늙음과 젊음의 결합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이들의 글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남태령 고개에서는 농민과 다양한 소수자의 결합과 협력이, 한남동에서는 맹추위에도 알루미늄 덮개를 쓰고 밤샘을 한 '키세스 군단'의 결기와 희생이 필자들의 눈길을 어김없이 사로잡았다. 필자 중에는 3대 집회 현장 중 적어도 하나 이상에 참가한 사람이 많다. 불가피하게 그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던 필자도 세 장소의 투쟁을 가장 많이 언급하며 투쟁 열기를 다지거나 투쟁의 의미를 풀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쓴 글이라 한 편 한 편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읽으면서 유독 눈이 멈춘 감동적인 대목이 있다.
동작역에서 한 장애인 여성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국회를 침탈하고 있습니다. 국회로 가 주세요." 떨리면서 촉촉한 목소리다. <중략> 그 순간 "국회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갑니다", "저도요". 여기저기서 합세한 소리들이 전철 안에 퍼진다.(30쪽, 함칠성 '나에게 묻다')
이런 시민들의 연대가 내란을 종식시킨 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수 백자가 외대 출신인 걸 알았다. 그는 계엄 발표 뒤 국회로 가기 전에 직업정신을 발휘해 급히 <분노쏭>이라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집회 때 인기곡이 된 개사곡 <탄핵이 답이다>(원곡 <팰리스 나비다>)와 <탄핵열차>(원곡 <남행열차>)는 계엄 다음 날 국회 앞 집회 때 처음 소개한 곡들이다.
폭넓은 연령대, 다양한 직업군으로 이뤄진 필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과 나의 차이와 닮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참된 연대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은 그런 마당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매우 소중한 기록이다.
사람들의 기억이 하나하나 모여 기록이 되고, 이 기록들이 쌓여 결국 후대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책의 필진이 한 개의 대학 출신으로 구성되어 이 시대를 기록하는 대표성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몇몇 내란범에 의해 이 땅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무너지고 역사가 몇십 년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함께 싸웠던 기억들을 모았다는 의미에서 나름 소중한 기록물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11쪽)
김종찬 외대 민주동문회 회장의 말처럼 이 책은 내란 저지 현장에 직접 참여해 행동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평가한 소중한, 그리고 최초의 현장 보고서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