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근, 시진핑, 트럼프, 이재명, 윤석열
제21대 대통령선거(6월 3일 실시)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외교·안보 문제가 크게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에 주재하는 한 외교관이 '바쁘겠다'는 질문에, "외교 문제가 쟁점이 안 되어서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라고 여유를 부릴 정도였다.
21대 대선에서 외교·안보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던 것은, 외교·안보에 문제가 없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중 패권 갈등의 심화와 '미국 제일주의자'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등장은 한국의 외교·안보 상황을 최대 위험 수위로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모든 문제를 뒤엎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란 사태 탓이 컸다.
한국은 현재 세계 경제력 10위, 군사력 6위를 기록하는 중강국이다. 190개 국이 넘는 유엔 회원국 기준으로 보면, 누가 봐도 앞줄에 서 있는 나라다. 하지만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4대 강국(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비교하면 전혀 딴판이다. 한마디로, 지리적 위치가 낳은 비극이다. 한국은 4대 강국 사이에 '끼인 나라'라는 정체성을 안고 고단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한반도 국제정치의 비극-동북아 패권 경쟁과 한국의 선택>(박영사, 전봉근 지음, 2023년 6월)은 '안보 취약국'이며 '자원·에너지 취약국'인 한국이 격랑의 세계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담고 있다. 저자인 전봉근 씨는 2005년부터 2023년까지 국립외교원 교수를 지내면서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을 연구해온 전문 학자다. 그가 국립외교원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연구했던 보고서와 논문을 묶어서 낸 게 이 책이다.
그는 진지하게 묻는다. '한국은 누구인가?' '힌반도, 동북아, 지구에서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한반도, 동북아, 나아가 지구 지정학에서 한국의 위상, 임무, 역할은 무엇인가?' '한국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의 기본 지침이 되는 대전략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에 대해 저자가 답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답을 찾기 위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직으로 한국의 역사를 더듬고, 수평으로 세계 지도를 펼쳐들고 논지를 전개한다.
그는 한국의 정체성을 분단국가, 중견 국가, 끼인 국가(중추 국가), 통상국가로 정의한다. 중견국가는 세계적으로 국력을 무시할 수 없는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통상 국가도 자원과 에너지의 빈곤을 딛고 자유무역을 통해 성취를 이룬 점에서 긍정성이 강하다. 끼인 국가는 지정학적인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고, 분단국가는 항상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정성이 강하다.
그는 '국뽕'의 시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위치를 냉정하게 평가한다. 외교·안보·통일 문제를 논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좌파나 우파의 이념적인 색채도 느낄 수 없다. 담담하게 있는 대로 분석하고 주장하는 기조가 책 전체를 지배한다. 그래서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는 한국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경계선, 미-중 패권의 최전선, 남북 분단, 남남 갈등이라는 4개의 대치선 위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최근 들어 미-중 패권 경쟁이 전면화하면서 그동안 발전 전략으로 취했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정책)'이 파탄 났고, 양쪽으로부터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을 최대의 위기로 본다.
이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국내에서 미국 편승과 미·중 균형 등의 주장이 있지만, 그는 미국과 동맹을 중시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의존도가 큰 중국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남아, 동·중유럽, 남아시아 국가 등과 연대하고 협력을 강화하면서 위험을 분산하는 노력을 활발하게 펼칠 것을 주문한다. 너무 당연한 방안으로 보이지만 그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제시하는 동서고금의 여러 사례가 참고가 된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과거와 현재 동북아 지정학과 패권 경쟁 동향을 분석하고 평가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이 임진왜란을 경계로 크게 변했다는 분석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한반도는 중국의 중원 세력과 초원 세력의 싸움 과정에 연루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로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패권 경쟁이 한반도 운명에 큰 영향을 주게 됐다는 것이다.
2부는 한국 외교의 '전략 빈곤' 현상을 분석하고, 전략적 사고의 방법과 국가 안보전략을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지 방안을 제시한다. 한국이 미국 식의 국가 안보전략 보고서를 처음 내기 시작한 때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때였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지도도 없이 행군을 해온 셈이라는 것인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역시 국가 전략 부분에서도 선구자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이후에 들어선 정부는 모두 비슷한 보고서를 내고 있다.
3부는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한국의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략인지를 제시했다. 저자는 한미 동맹을 확대 발전시키면서 중국과도 전략적 협력관계를 심화하는 미중에 대한 '이중 편승'을 첫 번째 방법으로 제시한다. 또 미중 경쟁에서 끼인 위치에 있는 유사국과 연대를 꾀하는 걸 두 번째 방법으로 든다. 일본과, 오랫동안 강대국 세력 경쟁과 지정학적 충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동아시아, 남태평양의 중간 국가, 유라시아 대륙 주변부의 지정학적 지진대에 놓인 중추 국가들이 유사국 대상에 오른 나라들이다.
'핵 무장국'이 된 북한에 대응하는 방법도 나온다. 우파를 중심으로 나오는 핵무기 개발과 전술핵 도입, 나토 식의 핵 공유, 핵 잠재력 개발론을 한국이 처한 현실 여건을 들어 일일이 격파하면서, 미국의 핵우산을 통한 억지력 강화가 최선이라고 말한다. 또 정권의 교대에 관계없이 외교 전략이 흔들리지 않고 작동하려면 국가 전략에 대한 국민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중 경쟁으로 인해 반세계, 탈 동조화, 진영화가 진행되자, 한국은 다른 중소국가보다 더 크게 경제적, 안보적 리스크에 노출되었다. 한국은 여전히 자원빈국이고 경제의 대외적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은 '경제 취약국'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분단된 북한과 항구적인 안보 경쟁에 빠진데다,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안보 취약국'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하지만 우리 안보는 한미 동맹과 자강에 집중하고 지역 안보 협력, 국제안보 협력, 주변 적대관계 해소를 등한시했다. 경제도 소수 국가와 소수 품목에 수출입이 집중되었고, 정부도 기업도 눈앞의 경제적 편익을 위해 경제 다변화 전략을 외면했다."(417쪽)
위에 나오는 저자의 말에, 그의 문제의식과 고민, 해결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침 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캐나다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했다. '이재명 외교'의 첫 출발이자 본격적인 시동을 알리는 행보다.
외교는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 '국민과 함께' 그리고 '세계와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이 책은 독자에게 한국 외교가 당면한 위기와 기회를 색깔의 편향 없이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