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0일, 총리 개인 소감
전후 80년에 즈음하여
(시작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이 되었습니다.
이 80년 동안 우리 일본은 줄곧 평화국가로서의 길을 걸어왔으며,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진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의 고귀한 목숨과 고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저는 올해 3월의 이오지마 방문, 4월의 필리핀 카리라야 전몰자 위령비 참배, 6월의 오키나와 전몰자 추도식 참석과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 방문, 8월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추도식 참석, 그리고 종전기념일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참석을 통해, 지난 전쟁의 교훈과 반성을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길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전후 50년, 60년, 70년의 시점마다 역대 내각총리대신 담화가 발표되어 왔으며,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이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세 차례의 담화에서는 ‘왜 그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도 “일본은 외교적·경제적 교착을 힘의 행사로 해결하려 하였고, 국내 정치 체제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였다”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 이상의 상세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국내의 정치 체제는 그 제동장치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세계가 총력전의 시대로 들어선 가운데, 개전 이전 내각이 설치한 ‘총력전연구소’나 육군성이 설치한 이른바 ‘아키마루(秋丸) 기관’ 등의 분석에 따르면, 패전은 이미 필연이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 또한 전쟁 수행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을 피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무모한 전쟁으로 돌진하여 국내외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는가.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전 총리가 “서서히 가난해지는 것을 피하려다 급격히 가난해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경고했음에도, 왜 우리는 그 큰 노선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는가.
전후 80년의 이 시점에서, 저는 이러한 물음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문제점)
우선, 당시의 제도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전(戰前)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장치가 없었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인 ‘통수권’이 독립된 것으로 간주되어,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서 항상 정치, 곧 문민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국헌법하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이 대등한 관계로 규정되어 있었고, 총리가 내각의 수반이긴 했으나 내각을 통솔하기 위한 지휘·명령 권한은 제도상 부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군사·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사로서 군사에 종사한 경력을 지닌 원로들은 군사를 깊이 이해한 바탕 위에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을 빌리면, “원로·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가 국가 의사의 일원화에 중요한 구실을 했던 것입니다.
원로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이러한 비공식적 장치가 약화된 뒤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아래에서 정당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세계적 격변을 초래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협조의 주요한 담당자 중 하나가 되었고,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을 맡았습니다. 1920년대 정부의 정책은 ‘시데하라(幣原) 외교’가 보여주었듯 제국주의적 팽창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의 여론은 군에 엄격했고, 정당들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은 위축감을 느꼈고, 이에 대한 반발이 쇼와기에 군부가 대두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종래 통수권은 작전 지휘에 관한 군령으로 한정되고, 예산이나 체제 정비에 관한 군정은 내각의 일원인 국무대신의 보필(輔弼) 사항으로 해석·운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문민통제 부재라는 제도상의 문제를 원로가, 이어서 정당이, 일종의 ‘운용’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부의 문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통수권의 의미는 점차 확대해석되었고, 그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과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당내각의 시대에는 정권 획득을 둘러싼 정당 간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지며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의 일각과 손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간범(干犯: 침해한 자)’이라 주장하며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가까스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을 두고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의 재료로 삼아 비난하면서, 군부까지 휘말린 정치 문제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하여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으나, 결국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종래의 통설로 여겨지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 성명’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였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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