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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유경 Aug 11. 2018

덩샤오핑이 구한 아나운서

아나운서직업탐구 


24년 방송 생활 가운데 18년간 매일 생방송이 있었습니다.  

아나운서실을 떠나 있었던 5년과  미국 연수 기간 1년을 제외하면 결국 방송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매일 생방송 속에서 살아온 셈입니다.   '아나운서 직업탐구 에피소드 1' 의 독자라면 KBS 방송국이 있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시곗바늘처럼 살아온 저의 삶의 궤적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KBS2TV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지요?

매일 오전 6시부터 8시 30분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된 교양 정보 프로그램이었죠. 요즘 방송되는  <아침이 좋다>의 조상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능이 대세인 요즘과는 달리 당시는 교양 프로그램의 전성 시대였고 KBS, MBC, SBS 가 맹위를 떨치던 방송의 삼국시대였습니다. 시청자들의 호응도 컸던 만큼 이른 아침부터 채널간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국민 앵커 손석희 JTBC 보도 부문 사장도 MC 허수경 씨와 MBC <아침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죠. 저의 기억 속 두 MC의 투 샷은 정말 반짝반짝 눈이 부셨어요. KBS1TV <아침마당>과 경쟁 시간대 프로그램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아침 만들기>를 더 좋아했어요.  제가 나중에  <아침마당>의 진행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죠.


신입사원을 갓 벗어난 저는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의 진행자로 발탁되어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 젊은 아나운서들은 이른 아침 생방송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는 아나운서들이 선망하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방송 광고계의 용어인 '3B'를 들어보셨죠?  3B는 Beauty(미인), Baby(아기), Beast(동물) 인데요,  예나 지금이나 제작자들 사이에서 시청자의 관심을 잡아두는 3대 요소로 꼽힙니다. 특히 하루의 시작을 여는 아침 방송에서 Beauty(미인)을 앞세운 프로그램 마케팅이 흐름이었고, 여성 MC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역대 여성 진행자 가운데 미스코리아와 탤런트 출신이 많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렇다고 절대 오해는 말아주세요. 제가 그 미모의 전통을 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MC선택의 분위기가 시소처럼 왔다갔다 하는데요 마침 방송 진행  능력 강화 쪽으로 흐르면서 저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드디어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잘하고 싶었겠어요. 진행 능력에 있어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망하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행복하기보다는 항상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한창 젊었던 20대 후반의 미혼, 제가 돌봐야 할 아이나 신경 써야 할 남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친정어머니가 모든 뒤치닥 거리를 다 해주시던 리즈시절이었는데 왜 지금보다 훨씬 더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그만큼 스트레스와 긴장도가 높았던 탓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막상 방송에 투입되고 보니 여자 아나운서의 역할이 기대 밖으로 미미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남자 진행자 옆에서 맞장구치면서 환하게 웃으면 되는 역할이었습니다. 좀 더 노련해지고 지혜로워진 방송 경력 24년 차 베테랑 아나운서로서 돌이켜보면 사실 멘트 한마디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맞장구, 표정 같은 리액션일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꽃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이 제작진이 나에게 바라는 역할인가 보다 생각하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러려고 그 어려운 시험(300대 1)을 준비해서 아나운서가 되었나 좌절감을 느꼈죠. 지금도 방송을 시작하는 여자 아나운서 후배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조금 여유 있는 마음으로 방송에 임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본인을 괴롭히지 말라고요. 문제의 핵심은 2MC 진행에서 말을 누가 많이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방송 프로그램의 구조가 가부장적인 데에 있는 것이니까요. 방송에서 오랫동안 고정화된 남녀 역할에 대해서도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옛날 사람 인증을 확실하게 했는데요. 18년간의 방송생활 가운데 딱 한번 생방송에 지각했던 흑역사가 바로 그 시절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 날 너무 곤하게 잠들었다가 잠결에 알람시계를 눌러 꺼버렸던 겁니다.

화들짝 눈을 떠보니 새벽 5시 45분....

집에서 회사까지는 보통 20분 소요되니 잠옷을 입은 채로 튀어 나간다 해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죠. 얼마나 당황스럽고 긴장했던지 손이 너무 떨려서 아버지 차에 실려가는 내내 셔츠 단추를 딱 두 개 간신히 채웠습니다.

정확히 1997년 2월 19일의 일이었습니다.

일기라도 써 놓았나 싶으신가요?

언제든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나오는 날이기에 제가 틀릴 리가 없습니다.


그 날 새벽 중국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지도자 덩샤오핑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각 방송사는 아침 뉴스에서 덩샤오핑의 사망을 속보로 전하였고 <생방송 아침을 달린다>도 긴급 뉴스를 전하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게 된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운이 좋은 날도 있을까요? 덩샤오핑의 사망 소식이 나비효과를 발휘해서 저의 생방송 펑크를 막아주었다니까요.

생방송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가까스로 방송용 옷을 갈아입고 노메이크업 상태로 정규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 날은 시청자들에게 첫인사를 전할 때는 맨 얼굴이었고요,  ENG(미리 녹화된 방송 분량)이 나갈 때마다 틈틈이 분장을 해서 끝인사를 할 때쯤 완벽한 모습이 되었죠. 방송이 끝난 후 선배님들께 엄청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주어 감동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끙끙거리는 줄 알았는데 힘들게 분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배들도 짐짓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선배가 되고 보니 후배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보이는 신통력이 생기더라고요.

크게 반성하고 정신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침대 맡에  알람시계의 개수를 늘렸습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 생방송에 지각하는 실수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구해 줄 덩샤오핑 같은 은인이 또 있을 리 없으니까요.






아나듀서 오유경 | 전 KBS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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