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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유경 Aug 04. 2018

아나운서 직업탐구

에피소드 1. 시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의 애환 


#1.


근로자로서 아나운서는 어떤 직업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시간에 매여 사는 직업’이다.

아나운서들은 하루 24시간 가운데 새벽 불과 몇 시간을 제외하고 매시간 라디오 정시뉴스를 진행한다.

 1년 365일 쉼 없이 돌아가는 일이다.

이를 '현업'이라 하고 아나운서의 기본 업무다.

프로그램 진행, 뉴스 보도, 스포츠 중계 등은 '전담 프로그램'이라 한다.

아나운서들은 공통적으로 기본 업무인 현업을 하고 개인적 특성과 능력에 따라  전담을 맡는다.

요즘 나의 전담 프로그램인 '아침마당'을 내려와서 하고 있는 일도 현업이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속 신데렐라는 ‘자정’의 약속을 한 번만 지키면 되었는데도

왕자와의 황홀한 순간에 빠져 제 시간을 못 맞추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다 유리구두 한쪽을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 실수로 인해 오히려 왕비가 되는 이야기이지만  신데렐라의 직업이 아나운서였는데 뉴스 시간을 못 맞췄다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겼을 것이다. 

현실적인 예는 아니지만  매 시각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 직업의 특성을 표현하자면 그렇다. 

시간에 강박증이 있는 아나운서들이 공통적으로 꾸는 악몽이 있다.

뉴스 스튜디오에 늦게 도착한다거나, 아무리 뛰어도 뛰어도 도착을 못한다거나, 중간에 길을 잃어 스튜디오를 못 찾는다거나 하는 등이다.


아나운서실 뉴스 배당 모니터_ 매시 40분이면 알람과 함께 뉴스 출발을 알린다. 개인 휴대전화 메시지로도 알림 문자가 온다. '출' 자는 뉴스하러 출발했다는 표시이다. 



#2.


아침 일찍 데일리 생방송을 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크다.

<아침마당>은 새벽 5시부터 준비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기 딱 좋은 시간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반복되어야 하는 데다 

진행자의 컨디션은 방송의 품질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에  수행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가장 가혹했던 기억은 <KBS 뉴스광장>을 진행했던 때였다.

새벽 2시 반이면 일어났다. 

한창 단잠에 빠질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어려움이 다가 아니다. 

정작 힘들었던 것은  저녁 8시부터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한가로운 저녁,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시청

아니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저녁 시간이 주는 아름다운 감성을 철저히 외면하고

매일 퇴근하기가 무섭게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최근까지 뉴스광장의 앵커를 진행했던 동기 기자에게 몇 시에 자느냐 물었더니

집이 먼 그는 오후 6시면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2시에 일어난다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을 전달하는 뉴스를 위해 세상과 일찌감치 단절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오직 <뉴스광장>만을 위해 살던 어느 날이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당황하여 잠시 꼼짝을 못 하였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혹시 꿈일까 싶어서 아니 꿈이길 바라며 호흡을 가다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천천히 시계를 봤다.

야속하게도 어김없는 5시였다.

벌떡 일어나 세수할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옷을 입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런데 왠지 공기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도로에 차도 많았다.

오후 5시였다.

'아... 살았다.'

하늘에 감사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십년감수라는 말은 정확히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아나운서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해프닝이다. 



2008년 KBS1TV  <KBS 뉴스라인>


#3.


KBS의 대표 장수 프로그램인 <6시 내 고향>을 진행하던 때였다.

위클리 프로그램인 <한국의 미>도 전담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매주 유적지로 출장을 다녔다.

문제는 출장지가 어디든 오후 4시까지는 여의도에 들어와야 6시 생방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서울이나 경기도 인근은 큰 문제가 없다.

부득이 광주를 갔는데 촬영이 순조롭지 않아 조금 빠듯하게 끝났다.

광주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면 6시 생방송은 펑크가 날 상황이었다.

방송가에는 이런 다급한 상황을 극복한 여러 무용담이 있는데 

우리는 항공회사의 협조로 10여 분 늦게 이륙하여 무사히 생방송을 해냈다.

늦었지만 당시 불편을 겪은 승객들께 미안한 마음과 감사를 전한다. 

한 번은 강원도로 촬영을 갔다.

한겨울 이른 새벽부터 녹화를  시작하여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예고에 없던 눈이 퍼붓기 시작하는 거다

길은 얼어붙어 있고 눈은 오고 맘은 촉박한 상황이었다.

겨우 차 두 대가 다닐만한 산길을 달리고 있는데

앞에서 마주 오던 대형트럭이 빙판에 미끄러져 빙글빙글 돌면서 우리 차량을 덮칠 듯 미끄러져 왔다.

달리 피할 방법도 없고 눈 뜬 채로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트럭은 1cm 정도 간격을 두고 비켜나가면서 가까스로 멈췄다.

다행히 죽을 때는 아니었나 보다.

일행은 놀란 마음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서울로 향했다.

가까스로 생방송에 늦지 않았지만, 피가 마르고 뼈가 녹는 하루였다.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양해'가 불가능한 시간에 매어 있는 사람들의 애환이랄까.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매번 성공만 한 것은 아니다. 

진짜 생방송에 늦었던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드린다. 






 

 KBS 아나운서 오유경

전 KWAVE편집인/ KBSAVE 대표 

https://www.facebook.com/yu.oh.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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