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 휘서 Aug 13. 2020

MP3를 다시 꺼내 들었다

당신의 음악은 어디에 있나요?


많은 물건을 내보냈지만 MP3는 선뜻 비우지 못했다. '왠지 쓸 것 같아서'였다.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일까. 가물가물한 현대의 유물 같은 존재지만 몇 달을 고이 보관해왔다.


그런데 설마 했던 예감이 적중했다. 며칠 전부터 MP3가 다시 내 일상에 들어왔으니.


왜 다시 이 물건을 찾았을까? 먼저 핸드폰을 향한 반항이 컸다. 언제부터인가 분신처럼 되어버린 물건,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여다보는 최고의 중독. 하루에 이래저래 접속하는 시간을 더하면 평균 4~5시간은 차지하겠지. 메시지 확인, 실시간 뉴스, 메일함, SNS 반응, 야구 스코어, 길 찾기 등등. 모든 세상으로 접속하는 만능 기계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음악 또한 유튜브로 듣는다.


그러나 갈수록 이 작은 기계에 필요 이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엄습한다. 유튜브로 듣는 음악 또한 마찬가지. 가끔 좋아하는 음악을 무료로 듣기 위해서는 광고도 봐줘야 한다. 얄짤없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응한다. 그런데 보다 문제는 샛길로 자주 빠진다는 점이다. 실시간 인기 영상으로 빠지기도 하고 어느새 SNS를 몇 십분 째 하고 있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숱한 정보의 범람과 흐트러진 집중력에 눈과 뇌가 피로해진다.


고민 끝에 해결책으로 잠자는 선반의 공주 MP3를 꺼내 들었다.


'음악만 들어보자.'


작은 기계 위에 덧씌운 말랑말랑한 실리콘 케이스는 묵은 먼지가 얕게 깔려 있었다. 손으로 대충 슥슥 닦아내고 충전기를 찾아본다. 다행히 각종 충전기를 모아둔 서랍에는 넓적한 접속 단자를 지닌 전용 충전기가 있었다. 자주 구부러뜨린 부분은 구리선이 드러난 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다행이다 싶어 얼른 충전을 한다.



1시간 즈음 지나니 녹색으로 가득 찬 전지 그림이 뜬다. 이어폰을 가져와 꽂고선 버튼을 누른다.


손에 쥔 첫 느낌은 '와, 이렇게 작고 가벼웠단 말인가!'였다.

그간 각종 고기능을 탑재하느라 무거워진 스마트폰에 적응한 손목이 환호성을 지를 만한 무게, 가뿐한 그립감을 오랜만에 느껴본다. 화면을 켜자 음악, 비디오, 사진 등으로 구획된 글자가 보이고 '음악'글자를 누르자 재생목록, 아티스트, 앨범, 노래, 장르, 작곡가 등으로 분류된 세부항목이 보인다.


아무 폴더나 클릭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둥둥둥 둥... 'It's beautiful night~~~ '

신나는 멜로디. Bruno Mars의 Marry You가 흐른다.

7~8년 전쯤 유행했던 노래, 연락이 끊긴 친구가 떠오른다. 7월의 한여름 밤, 압구정의 어느 술집에서 맑은 술잔을 기울이다 그녀는 노래가 쳐진다며 직원에게 달려가 이 음악으로 바꿨더랬다. 음악이 바뀌자 씩 웃어 보이던 친구.


다음은 Winter Love라는 현악곡. 이 음악의 표지 사진을 보자마자 한 사람이 떠오른다. Marry You를 좋아한 친구의 지인으우연히 합석했던 사람. 바이올린인지 첼로인지를 취미로 하던 . 친구들은 모르는 비밀 썸을 탔었는데 그 사람과 함께 본 영화의 OST였다. 영화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건대의 한 극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갈 정도로 바빴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에 짬을 내어 삼성동에서 건대까지 동행했던 한 때의 순정이 떠올랐다.


이어지는 곡은 Hey, Soul Sister. 기분을 업시키는 경쾌함에 참 좋아했던 곡이다. 제주도, 워크숍을 빙자한 회사 단체 여행의 기억이 즉각 소환되었다. 승합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제주도 해안도로를 신나게 달렸을 때 듣던 곡 중 하나다. 그때 각자의 좋아하는 곡을 돌아가며 BGM으로 틀었는데 차 안을 가득 울렸던 신나는 메들리를 목청껏 따라 불렀었지. 추운 줄도 모르고 11월의 칼바람을 쉴 새 없이 맞으며.


그리고 이어지는 플레이 리스트.


짙은 'TV쇼'

어쿠스틱 콜라보 '그대와 나, 설레임'

자우림 '스물다섯, 스물하나'

Jeff Bernat 'If you wonder'

MAKSIM 'Croatian Rhapsody'

러브레터 OST 'Small Happiness'

제이 래빗 '바람이 불어오는 곳'

로맨스가 필요해 OST 'I could give you love'

말할 수 없는 비밀 OST '여부공무'

...

.


한 곡 한 곡이 모두 생생하다. 노천극장을 가득 메웠던 떼창이 되살아났고, 청춘의 열기와 달뜬 기분만 떠다녔던 5월 페스티벌의 밤공기가 생각났다. 밤샘 통화를 이어갔던 짧은 사랑의 웃음소리가 떠올랐고 일의 고단함을 잊으려 도피처로 삼았던 청량한 선율이 다시 들려왔다.


MP3는 단순히 잊힌 물건이 아니었다. 아득했던 한 시절을 고스란히 담은 기억의 만물상자였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노래와 연관된 사람이 나타났다. 잊고 있던 설렘이 돌아왔다. 다시 꺼내 들지 않았으면 영원히 묻혔을 장면이 무한대로 재생되었다.


이어폰을 꼽자마자 추억이 피어오른다. 슬며시 미소 짓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당분간은 이 소중한 나날을 한껏 즐길 생각이다. 첫 음악을 듣기 전에는 '요즘 노래로 채워 넣고 기분 전환해야지.' 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한동안 최신 노래는 보류하련다. 음악스며든 기억을 와인을  모금씩 넘기듯 음미해야지.


휙휙 바뀌는 세상, 이곳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좀 느려도 되지 않을까. 나만의 시공간을 충분히 즐기고 싶다.

기억을 소환하는 밤이 다할 때까지, 느긋하고 달큰하게. 





위 포스팅은 브런치 추천 콘텐츠로 선정되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