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처음엔 몇 장 읽고 덮었다. 책의 판형도 크지 않은데다, 때문에 글자 크기도 당연히 작은데, 그보다 더 작은 크기(정말 작다!)의 글자가 각주로 페이지 양 옆에 주르륵 나열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이지를 팍팍 넘기며 독서의 맛을 느끼고 싶은데 넘길만 하면 나타나는 각주를 스킵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꽤나 커 무시할 수 없었기에 페이지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첫 이미지는 그냥 이랬다. 한 페이지에 글자가 너무… 너무 많아!
그랬는데, 다시 읽고 싶어졌다. 주로 내가 주체가 되어 읽을 책을 고르지만 그럴 때가 있다. 책이 나를 부르는 때. 선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있다. 책등이 나를 향해 강력한 빔을 쏠 때가. 나를 집어. 나를 열어. 나를 읽어, 할 때가. 내가 완벽한 객체가 되는 때가 있다.이 책도 그랬다. 유난히 내 안이 소란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제목의 힘이 셌다
산책 카테고리에 글을 쓰면서 책의 구절은 인용하지 않고, 책을 읽고 느낀 내 생각과 감상만 적겠노라 규칙을 세웠는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겠다. 작가의 손을 통해 온 글자들을 내가 한 톨도 침범할 수가 없어진다. 작가의 글을 빌어오지 않고서는 말을 이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글을 빌려오지 않고서는 읽은 후의 생각과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제목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인데 읽고 난 후 도저히 ‘침묵’할 수 만은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공연예술이라는 것과 나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책 속에 나오는 공연을 우연한 기회나, 고대하던 순간으로 만났던 순간이 내게도 있었고 자연스레 그 설레던 어둠의 냄새, 달뜨지만 짐짓 차분함을 유지하려는 객석의 호흡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공연이 그럴 수 없는데도, 모든 공연이 좋았다. 공연 자체가 좋은 경우도 있지만, 공연을 에워싼 모든 순간들이 결국 좋았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도 혹 공연예술과 거리가 멀다 생각 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가깝다는 걸 이내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하듯, ‘실은 일상에서 보다 훨씬 깊게 누군가의 존재에 집중하는 탓으로(p.41)’, 무대와 나의 사이는 ‘매일의 삶 속에서도(…)우리는 매순간 무언가에 막히고, 충격으로 아득해지고, 성찰의 거리를 취하고, 다시금 용기와 다정으로 몰두하고, 기필코 뒤돌아 나 자신을 또한 응시함으로써 굳건해(p.54-55)’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깝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다
공연예술에 대해 타국에서 지낸 작가가 가진 내밀한 경험과 감정, 생각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이 책은 어쩐지 그것에만 국한돼 있기 보다 타국에서 우리나라로, 공연예술에서 삶 그 자체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머물게 한다. 놓쳤었고, 놓치고 있고, 놓쳐칠 것들에 대한 아우성치는 침묵. 그 침묵을 듣고 있노라면 같이 흠뻑 울고 웃게 되는 이상한 침묵. 그 침묵은 작가의 강력한 외침이자 고백임을
읽고 나서 바로 적어내려가려 했던 글을 쓸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짧은 날들 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어쩐지 이 책과 닿아 있어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감정이 지속됐다. 이 책에 태깅해둔 페이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가며 이 글을 썼다. 작가가 말하는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p.47)’이기에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잠기지 말아야 한다. 잠길 수 밖에 없다면 다 함께 잠기기를. 그리고 ‘기필고 뒤돌아’ 빠짐없이 함께 헤쳐 나오기를
*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p.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