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이주혜
쓰고 싶은 말이 와르르 쏟아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말이 아예 필요 없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뭐랄까, 읽고 난 후 단정할 수 없는 파고를 안겨 준 내겐 새로운 장르의 이야기였다. 얇고 작은 판형에 옅은 분홍색을 띠고 <자두>라는 듣기만 해도 상큼한 이름의 제목을 달고서 여름의 한 가운데 출판 된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숨 참고 다이브…
서두를 읽고 책 표지와 책등을 다시 들춰봤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이 맞나? 순수하게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후에 작가에 대해 알아보니 실제 번역가이자 소설가였다. 작중 주인공 직업 또한 번역가였으므로 나는 이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이야기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지? 대체 왜 <자두>라는 상큼한 제목인거지? 무서우면 안 읽을래요. 왜요, 왜 오해받고 왜 실패했는데요… 왜요 퍼포먼스를 착실하게 수행하며 서두를 넘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저는 여름에 관한 상큼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요 여러분. 나는 고정관념 덩어리다! 나는 고정관념의 현신이다! 나는 단정짓기 대마왕이다! 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우선 추천할게요. 저처럼 와장창, 와자장창! 무언가 계속 부숴지는 것을 마주하며 한 여름의 가운데 서늘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책이고 무슨 내용이길래 (늘 그래왔듯)난리 블루스냐 묻는 다면, 간단하게는 은아와 은아의 남편 세진, 세진의 아버지이자 은아의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간병인 황영옥을 고용하며 일어나는 한 여름 한 달 동안의 이야기, 이긴 한데 이게 참 전쟁과 평화도 아니고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니냐며. 활자 밖에서 읽는 독자마저 헉 소리나는 일들의 연속이 휘모리장단으로 몰아치는, 폭풍의 눈 속에 있는 고요함인데 그 고요함이 이제 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은아는 또래처럼 보이는 간병인 영옥을 여사님, 영옥은 은아를 사모님이라 깍듯이 부르는 읽는이까지 다소 뻘쭘하게 만드는 혼란의 호칭 속에서 끝내 발하게 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유대랄까. 그 유대를 꼭 유대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끝끝내 유대가 연대가 되는 대환장의 유니버스가 이 두 여자 앞에 놓여 지는 이야기
쉽게 남의 말을 아무렇게나 하던 이가 전하던 영옥의 저주가 저주가 아님을, 영옥의 목소리로 마주하던 부분은 정말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먹먹하다. 그렇지만 나도 영옥처럼 쉽게 울지 않을 거야. 울지 않고 똑똑히 마주보고 마주할 것이다. 영옥처럼. 은아가 마지막까지 영옥을 찾고 영옥의 안부를 궁금해한 것을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괜찮을까? 앞으로 언젠가 문득 저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세진의 아버지이자, 은아의 시아버지, 시아버지의 누이와, 그 누이의 자식들 사이에서 나는 나로서 견고할 수 있을까? 은아처럼 그림자가 되어 묵묵히 ‘그들’의 뒤에서 ‘우리’에 배제된 채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독특한 책이다. 책의 예쁘고 단정한 제목만 보고 서둘러 앞서 걷다가, 이내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이르기까지 자분자분 뒤를 따르게 하는 책을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 이것도 단정하지 말아야지
우리 앞에 단정짓지 못 할 다정하지 않은 일들이 예상보다 자주, 생각보다 근거리에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부디, 함부로 단정짓지 말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툭 털고 일어나야지. 영옥처럼 손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붉거나 검붉거나 내 마음대로 자주 바꿔 바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