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주
내 첫 제주는 애월이었다. 첫 숙소는 서쪽 산방산 아래였고, 협재에 있는 두 곳을 더 옮겨 다니며 묵었다. 삼박 사일의 일정 동안 총 세 곳의 숙소에 각기 머물렀던 패기. 과연 젊음이었다
평소에 제주를 가보고 싶었다거나(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 해 제주를 여행하려 일찌감치 계획했던 것도 아니다. 친구가 갑자기 제주 가자!라고 했고, 덩다리우스인 나는 그래!라고 화답하며 첫 제주 짐을 꾸렸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내겐 말 위에서 새빨간 조끼를 걸쳐 입고 페도라를 멋지게 쓴 엄마의 사진을 본 이후, <제주-페도라=0>의 공식이 있었다. 0순위 패션템을 페도라로 정하고 며칠간 눈에 불을 켜고 멋쟁이 페도라를 찾아다녔다. SPA 브랜드에서 스웨이드 소재로 된 카키색의 완벽한 페도라를 찾았지만, 음… 피팅룸 거울을 통해 머리에 얹힌 페도라를 바라보며 조용히 원래 자리에 잘 가져다 놓는 것으로 나와 원만히 합의했다
그렇게 설레며 도착한 제주였고 첫날은 좋았다. 친구도 나도 둘 다 운전면허증이 없었으므로 뚜벅이로 열심히 다녔다. 그때만 해도 제주 버스 배차가 극악인 시절이었다. 60분은 귀여웠고, 보통 80-90분이었다. 시간이 재산이었으니까 기다릴 순 있었으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공포. 공포였다. 우리가 처음 잡은 곳은 매우 한적한 들에 호젓하게 위치한 산토리니 건축 같은 외형을 가진 숙소였다. 다른 옵션도 있었지만 가장 저렴한 10인실에 묵었는데, 10인실에도 우리 둘 뿐이고, 건물 전체에도… 우리 둘 뿐이었다(숙소 사장님이 출퇴근하는 형식이었다). 이 사실을 자정이 가까워서야 확신하고 영화 <나 홀로 집에> 케빈처럼 소리 지를 뻔했다. 물론 케빈과는 매우 다른 상황으로. 숙소도 으슥한데,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길은 더 무서웠다. 실제로 이상한 사람을 바로 만나 버려 우리는 경악했다. 몇 년 후 다시 찾은 제주에서, 한적한 버스 정류장은 평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곧 익숙해졌긴 하지만
그렇게 공포와 설렘 사이의 외줄을 무진장 타며, 우리는 내가 제주에 도착하면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로 향했다. <살롱 드 라방>이란 불란서 내음 물씬 나는 곳이었는데, 사진을 보고 반했던 나는 카페는 여기다! 이곳은 꼭 가야 한다!며 친구를 꼬셨다. 우리가 산방산 아래 숙소에서 옮긴 두 번째 숙소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린 후에도 마을을 한참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날 오전, 친구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제주 시내에 있는 병원까지 들린 돌발적 일정을 치른 후라 둘 다 조금 지쳐있었다. 그때도 제주의 가게들은 어쩐지 영업일보다 휴무일이 잦았는데, 그 휴무일도 네이버보다 인스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네이버와 인스타에도 모두 영업중임을 확인하고 자신 있게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내려서 꽤 헤맸다. 나는 확신의 길치라서 친구가 거의 방향키를 잡았는데, 컨디션이 떨어진 탓인지 점점 해가 지고 있어서인지 아님 둘 다였는지, 카페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나친 마을회관을 또 만나고, 또 만나길 두어 번. 드디어 <살롱 드 라방>에 도착했다
인스타에서 인기가 많은 곳이었는데 어쩐지 카페 앞에 차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고요했다. 나는 등 뒤에 서늘함을 느끼며 카페 입구로 갔다. 휴무일이란 표시도 없는데, 카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당을 동분서주하는데 카페 뒤편에서 오버롤을 입고 손에 망치를 든 사장님이 나오셨다. 당황한 얼굴로 ‘오늘 카페를 수리하는 중이라 영업을 안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친구는 카페 마당에 있던 그네에 털썩 앉더니 신발을 내동댕이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미안하면서 동시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오전에 제주 시내에 병원도 다녀오고, 그 병원에 대기하느라 4시간은 족히 쓰고, 점심도 못 먹고, 오늘 일정 이거 하난데! 이렇게 된 게 내 탓도 아니잖아. 나도 <살롱 드 라방>이 오늘 쉴지 알았나? 네이버도 인스타도 다 영업 중이라고 했다고... 우리 둘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저녁을 차려 먹을 때 까지도 꼭 필요한 대화 외에 나누지 않았다. 참으로 어색하고 지난한 밤이었다
그런 추억을 안고 있는 첫 제주. 그 이후에 한 번 더 가고, 또 그 이후 세 번째 제주를 그 친구와 또 갔다. 이번엔 달랐다. 친구가 운전면허증 소지자였고,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아닌 렌터카를 빌렸다. 친구가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앉아 창을 내리고 달리는 제주 풍경은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바람이 이렇게 청량했나? 하늘이 이렇게 푸르렀나?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친구랑 화기애애하게 우리의 첫 목적지인 동문시장을 가는 줄 알았는데? 마냥 달리더니 어느 곳에 도착해서 박력 있게 내리란다. 나는 마냥 설레었었으므로 거기가 어딘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예상할 생각도 안 하고 내렸다. 내리라니까 내렸는데 뭔가 익숙했다. 친구가 나를 태워, 나에게 함구하고, 첫 번째로 데려온 곳은 바로 <살롱 드 라방>이었다. 몇 년 전 우리에게 서먹함을 선사했던 바로 그 카페. 세상에나. 친구는 어안이 벙벙한 나를 뒤에 두고 개선장군처럼 카페에 들어갔다. 무슨 이런 이벤트가 다 있을까. <살롱 드 라방>에서 먹은 핫케이크와 음료, 흐르던 음악까지 생각난다. <살롱 드 라방>은 밖도 아름답지만 안이 더 아름다운 카페였다. 친구는 상기된 나에게 ‘소원 풀었냐’며 30주년 결혼기념여행 온 남편처럼 무심히 말을 건넸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맹세했던 것 같다. 잘하겠다고. 앞으로 너한테 평생 잘할게
제주. 제주 하면 특유의 하늘과 바다, 들, 밭, 돌 다 떠오르지만 유독 친구와의 첫 제주가 떠오른다. 그때 너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사건사고의 연속이었기 때문에(오름 아래서 콜택시 잡았는데 기사가 변태인 일화. 실화입니다) 두 번째 제주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세 번째 제주는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뭐든지 쓴 맛을 배워야 달콤한 게 더 와닿는달까. 그래서 제주는 내게 마냥 달디달고달디단 밤양갱 같은 맛은 아니다. 언제고 돌발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고, 그렇기에 다녀와서 왠지 더 단단해지는 곳이랄까? 그래서 또 가고 싶고, 왠지 수련원(?) 같고 그렇다. 다음 제주는 한라산이 목적인데, 언제쯤 수련하러 가볼까나. 제주야, 근데 이번엔 호락호락해도 괜찮을 것 같아. 쉽게도 가보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