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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장에서 배운 남자

<파일럿> 리뷰

by 오윤
요새 가족끼리 볼만한 영화가 있나?”


며칠 전 부모님의 오랜만의 영화관 관람 제의에 갑작스러운 난관에 부딪쳤다. 그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때문이다. 요 근래 들어 남녀노소 모두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의 숫자들은 확실히 줄었다. 지난번에 관람한 <데드풀과 울버린>만 하더라도 내가 재밌게 영화를 본 것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보기 그리 쉽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파일럿>이라는 영화가 눈에 띄었다. 코미디 장르에다가 한국영화 그리고 부모님도 아실만한 배우들의 출연. 이런 조건의 영화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파일럿>은 유명 비행기 조종사 ‘한정우(조정석)’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여동생 ‘한정미(한선화)’의 신분으로 여장하여 다른 항공사에 위장취업하는 내용의 영화다. 스타 파일럿으로 인기와 명예를 누린 ‘한정우’가 여장을 하면서 달라진 주변의 시선과 태도를 통해 그동안 소홀했던 주변 인간관계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코미디면서 드라마를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여동생 ‘한정미’로 여장한 ‘한정우(조정석)’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매력

간략하게 적은 시놉시스만 보더라도 이 영화에서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정석’ 배우가 맡은 ‘한정우’ 역은 주인공으로 여장남자를 연기하며 극을 이끌어나가는 역이다. 아무리 코미디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과장된 설정으로 보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설득시켜야 하는 상당히 중요한 배역이다. 신분을 위조하고 여장한다는 설정은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잘 상상이 가지 않을 수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이 설정을 시각적으로 그려냈을 때 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영화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정석’ 배우는 <엑시트>, <> 등으로 다져진 코믹연기와 뮤지컬에서의 트랜스젠더 연기 경험을 살려 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설정의 거부감을 줄였다. ‘조정석’이라는 배우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호감과 이미지가 이 영화의 진입 장벽 하나를 낮춰 준 셈이다.


동시에 ‘조정석’ 배우의 연기는 영화의 톤 앤 매너를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영화 <파일럿>은 가벼운 코미디 외에도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젠더갈등부터 성역할, 성별 할당제나 사회 계층 문제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이 될 수 있는 주제들이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이 주제들은 작품의 주제의식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영화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무겁게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중간중간 등장하는 ‘조정석’ 배우의 능청스러우면서도 따뜻한 연기와 유머들이 분위기를 환기시켜 이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는 않게 하는 완충제 역할을 한 것이다.


‘한정미’와 ‘한정우’를 왔다갔다하는 ‘한정우’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

<파일럿>의 ‘한정우’가 여장을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들과 그 설정들이 비단 사회고발 그 주제들을 다루기만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정우’라는 인물에게 조금 더 초점을 맞춰 본다면 이 이야기는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작중에 ‘한정우’라는 인물은 잘 나가는 스타 파일럿이었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주변 인간관계에서 그는 남에게 무심한 인물이다. 일에만 너무 몰두하여 어머니가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지는커녕 자신의 아들이 꿈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또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파일럿’이라는 직업 측면에서도 그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스타 파일럿’에 매몰되어 버려 비행 스케줄보다 방송 스케줄을 더 신경 쓸 정도로 직업에 대한 사랑이 점차 떨어져 갔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파일럿이 되었지만 성공의 맛을 본 뒤 점차 초심을 잃고 타락해 가던 인물이 ‘한정우’였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직장에서 잘리고 여장을 해보면서 겪는 사건들은 ‘한정우’에게 그동안 그가 보지 못했던 혹은 잊고 살았던 면들을 보여주었다. 그 덕에 ‘한정우’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이 열심히 살았고 또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생각했다. ‘한정우’의 진정한 꿈이 “하늘을 날다”인지 ’ 파일럿‘인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았다. 어쩌면 여장남자라는 설정은 이처럼 정체성을 갈등하고 성찰하는 ‘한정우’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정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을 가지라고 어른들에게 듣는다. 여기에 대부분의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은 ‘직업’으로서 그 ‘’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직업’이 그 ‘’을 꾼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꿈을 못 이뤘을 때 마치 인생이 실패한 것 같기도 하고 꿈을 이뤘더라도 그다음이 없는 허무한 감정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을 직업 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꾸라고. ‘날다’가 꿈이면 꼭 ‘파일럿’이 될 필요가 없다. 비행과 관련된 수많은 직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길들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그 직업이 되었을 때 하늘을 날 때마다 행복을 느끼면 된다.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가벼운 코미디에 약간의 드라마가 섞인 영화. <파일럿>이었다.

여장에서 배운 남자. <파일럿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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