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미키17 : 성장의 버튼을 누르다

미키17 감상문

by 오윤 Mar 06. 2025

 SF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종종 ‘’와 ‘’의 몸이 분리되거나, ‘’가 두 명이 되는 설정을 볼 수 있다. 혹은 기억만 따로 빼서 기계나 다른 유기체에 이식하는 설정도 흔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 개가 된 ‘’는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일까? 기억을 백업한 ‘’는 여전히 ‘’일까?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서도, 단순한 SF를 넘어서는 깊은 인간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기생충>과 <설국열차>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봉준호’감독이 약 6년 만에 선보인 작품으로, 이번에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SF 장르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복제 인간의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키17>이 내포하고 있는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

모종의 사건으로 동시에 존재하게 된 미키 17과 18

<미키17>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인류는 여러 이유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로 하고, 테라포밍을 위해 우주로 우주선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활용된 최첨단 기술 중 하나가 바로 ‘기억 백업 및 재프린팅’ 기술이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기억을 저장했다가 새로운 몸을 만들어 이식하는 방식으로, 해당 기술이 적용된 이들은 ‘익스펜더블(Expendable)’이라 불린다. 말 그대로 ‘소모품’처럼 반복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며, 전체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다.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시 익스펜더블로서 일하며 이미 16번이나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임무 중 사망하고, 모두가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여긴 채 18번째 ‘미키’를 프린트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죽었어야 할 17번째 미키가 살아 돌아온 것. 그리고 이제, 하나의 우주선 안에 두 명의 ‘미키’가 존재하게 된다. 원래 사라졌어야 할 17번째 ‘미키’가 생존하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재프린팅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미키’

프로의식,

——그건 남이 아닌 나 자신이 하는 말


영화 속에서 ‘익스펜더블’의 처우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은 몇 번이고 재프린팅될 수 있기에, 우주선 내 사람들은 ‘미키’를 위험한 임무로 내모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새로운 행성의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그를 실험체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익스펜더블들의 모습은, 만약 우리가 비슷한 기술을 얻게 된다면 어떤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들에서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윤리적 문제보다 더 보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느꼈다.

“그게 네 일이잖아.”


영화 속에서 익스펜더블인 ‘미키’는 이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고, 이미 이 점을 알고 계약했으니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사람들은 ‘미키’의 반복된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그의 희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대사는 단순히 복제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직업을 갖고 살아가며 ‘프로의식’을 요구받는다. 돈을 받는 이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때때로 이 프로의식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왕이다.” 이 말은 식당 직원들이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는 문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손님들은 이를 빌미로 부당한 대우를 정당화하고, 감정 노동자들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미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익스펜더블로서 다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일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희생을 “그게 네 일이잖아.”라는 말 한마디로 당연시해 버린다. 이 대사는 프로의식이란 측면에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미키’에게 몰입한 관객들에게는 잔인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미키17>은 복제인간의 윤리 문제를 넘어, 우리가 일하며 겪는 현실적인 고민과 상처까지 건드리는 영화다. SF라는 장르 속 익스펜더블이라는 설정을 통해, 일상에서 우리들 모두가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한 감정을 조명하고,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 있다.

다수를 위한 희생이 당연시된 ’미키‘

‘버튼’

—미키의 성장의 버튼


<미키17>의 장르는 SF이지만, 나는 이 영화를 ‘성장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정 계층에 대한 비판, 복제 인간의 윤리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영화의 주요 초점은 결국 ‘미키’라는 인물의 성장에 맞춰져 있다. 봉준호 감독 역시 복제인간이라는 설정조차 ‘미키’ 개인의 서사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했다. 미키는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영화 내내 그를 괴롭힌다. 그러던 후반부, 1718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1817을 위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위로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미키’들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위로였다. 두 미키의 대화는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성숙한 자아’를 형성해 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복제인간이라는 엄숙하고 부담스러운 주제를 ‘개인의 성장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든 셈이다.


미키의 성장 서사에서 ‘버튼(button)’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트라우마가 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도 버튼이 있고, 영화 곳곳에서 미키에게 ‘버튼’이 쥐어진다. 디테일을 중요시하는 봉준호 감독이 이 요소를 단순한 소품으로 사용했을 리 없다. ‘button’의 어원은 프랑스어 ‘bouton’, 즉 튀어나온 것을 의미하며, 초기에는 여드름, 뾰루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버튼은 셔츠의 단추로 쓰이기 시작했고, 현대에 와서는 기계 장치의 중요한 스위치 역할을 하는 버튼이 되었다. 이 단어의 변화 과정은 우주선 내에서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익스펜더블’ 미키의 성장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초반에는 스스로를 탓하며 순응하기만 하던 미키가 결국 자신의 쓰임과 자아를 깨닫고, 인류를 구하는 중요한 존재로 성장하는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미키’의 서사에 ‘버튼’이라는 요소를 활용한 것은 우주선 내에서 홀대받던 미키가, 마침내 하나의 존중받는 자아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버튼을 단 채 놓여진 미키 17과 18

창작물에서 ‘버튼’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작게는 음악을 트는 것부터, 크게는 전쟁을 일으키는 등 결정적 순간을 의미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버튼을 누른다는 행위에는 항상 선택과 책임이 따른다. ‘미키’의 삶은 버튼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눌리는 쪽’일까? ‘누르는 쪽’일까. 단순한 ‘소모품’일까, 아니면 진정한 ‘개인’일까? 사람들은 그의 희생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지만, 결국 그는 자신만의 선택을 하며 성장했다.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버튼 앞에 선다. 맡은 역할과 책임 속에서, 때로는 ‘그게 네 일이잖아’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희생을 감수해야 할까? 하지만 미키가 결국 버튼을 눌렀듯, 우리도 우리만의 버튼을 눌러야 할 순간이 온다. 그리고 <미키17>은 그 순간을 맞이할 용기를 주는, ‘봉준호’ 감독의 가장 따뜻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

.

.

.

.

<미키17 : 성장의 버튼을 누르다:_4.0_영화 미키17 감상문>



작가의 이전글 꿈과 초심, 그리고 코미디: <히트맨> 시리즈의 매력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