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래되진 않았다. 그저 내 마음을 풀어내고 싶었다. 혹시나 쓰고 나면 내 마음이 가벼워질까 싶어서. 생각보다 쉽게 조회수가 오르기도 하고 다음 메인에 노출되기도 했다. 내 마음을 써보기도 하고 고양이를 키우는 스토리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책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보고 욕심이 생겼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드는 여러 가지 생각을 글로 써보기로 했다. 제대로 써보자고 목차도 썼다. 생각보다 목차는 금방 써졌다. 루미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소중한 루미.
다시 글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차를 만들어 쓴 다음부터 글이 조금 어색해졌다. 없는 말을 만들어 쓴 것도 아니고 정말 내가 느낀 점을 썼다. 많은 목차 중에 가장 많이 느껴졌던 부분을 먼저 썼기 때문에 가장 마음이 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도 어색했다. 이유를 모르는 나는 글쓰기를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써보려고 끄적여 보다가도 뭔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난 잠시 멈췄다.
어느 날, 오랜만에 갑작스럽게 글쓰기를 배운 쏘냐 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린 근황과 아이들 이야기로 짧은 시간을 아껴가며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실컷 떨었다. 우리 둘째와 쏘냐 님의 첫째가 나이도 같아서 우린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헤어지기 전, 나는 고민을 털어놨다.
“제가 요즘 글을 열심히 써보려고 목차도 썼는데요, 뭔지 모르게 글이 어색해요. 목적을 가지고 쓰니까 어색한 건지, 왜 그런 걸까요?”
“음...”
잠시 뜸을 들이고 쏘냐 님은 말을 이어갔다.
“글을 쓸 때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아주 잠시 내 머릿속이 정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참으로 따뜻하고 정확하게 말해주시는 쏘냐 님이다. 만날 때마다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지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날도 그랬다.
“와.. 너무 좋은 말씀이에요. 적어놔야겠어요. 이건 제 글만이 아니고 제 삶과도 너무나 연결되는 거예요.”
나는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익숙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틀 안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 삶에 대한 자신감이나 통찰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이였다. 누군가 내 선택을 지지해줬으면 좋겠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크기도 했다. 내 선택을 온전히 내가 책임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도 크고 작은 결정을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이야기하곤 했다. 대부분 부모님은 내 의견과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셨다.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짜증을 내다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방향을 따를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부모님이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 왜 자꾸 먼저 말해? 그냥 너 마음대로 해.”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잖아.”
부모님의 간섭을 크게 받지 않고 자란 남편에게는 이런 내가 조금 이상해 보였던 것 같다. 성인이고 결혼도 했는데 왜 자꾸 부모님께 여쭤보는지. 결국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말하는지. 마음대로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남편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난 왜 자꾸 나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할까. 아무리 인생의 큰 결정이라도 내가 책임지면 될 일이다. 남편과의 합의는 대부분 필요하지만 그 외에는 불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한동안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자 노력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편을 선택했다.
조금 나아진 줄 알았다.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아도 내 결정을 대부분 이해해주는 남편과 살면서 참 좋았다. 그런데 쏘냐 님이 내 글에서 그것을 읽어버렸다. 숨겨진 내 욕심이 발가벗겨지듯 들켜버렸다. 내가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는 순간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내 생각을 따라와 줬으면 했던 것 같다.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내 생각을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이건 욕심이다. 난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
글쓰기에도, 디자인에도, 브랜딩에도, 인생에도 모두 통하는 말이다.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고 보여주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로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를 꾸미지 않아도 나를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너무 애쓰지 않는 나의 하루하루가 겹겹이 쌓여 내 삶이 되길 바란다. 삶의 마지막 길에 나와의 시간을 되짚으며 그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글쓰기를 배운 줄 알았는데 인생을 배운다. 글자를 쓰는 줄 알았는데 인생을 쓴다. 쓰는 건 참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