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42. 어찌 보면 많은 나이지만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다. 난 몸이 종종 아프다. 큰 병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가보면 특별히 이상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몸이 아프다. 이유가 뭘까.
건강해지려고 애쓰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애를 쓸수록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몇 년 전, 필라테스를 배우러 가서 단체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생각보다 잘한다며 칭찬을 해줬고, 열심히 운동을 했다. 몇 번을 갔는데 한 달도 안돼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병원에 갔더니 이석증이라고 했다. 쉬어야 한다고 했다. 어지러워서 울렁거리고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또 한 번은 SNPE 운동을 하러 갔다. 거기서도 몸을 뒤로 젖혀 머리가 내려가거나 구르기 동작을 하면 어지러웠다. 그런 동작은 할 수가 없었고, 선생님도 안 되는 동작을 무리해서 하지 말라고 했다. 멍하니 다른 회원분들이 동작하는 걸 보면 자괴감이 들었다. 그때 난 30대였는데, 따라 하지도 못하는 동작들을 5-60대 어르신들도 잘만 하셨다. 도대체 내 몸은 왜 이런 걸까.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고 며칠이 지나서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렇게 더운 날씨도 아닌데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4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견딜 수 없이 힘이 들었다. 도착해서는 토할 것 같고 기운이 빠져서 화장실에 한참을 있었다. 숨도 막혔다. 이런 게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일까 싶으면서 무서워졌다. 남편이 데리러 와서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다음날은 아이 등굣길에 데려다주는데 또 숨 쉬기가 곤란해지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겨우 집에 와서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갔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문제는 없다고 했다. 미주신경성실신인 것 같다며 특별한 건 없고,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일단 앉으라고 했다. 쓰러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쓰러지다가 머리나 어딘가를 부딪히면 크게 다칠 수 있다고 했다. 잠시 앉아있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선생님, 왜 이런 거예요? 아이 학교가 정말 가깝거든요. 그 거리를 걸었다고 이렇게 힘든 건 이상하잖아요”
“지금 본인 몸에는 그것도 힘든 거예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고작 몇백 미터도 걸을 수 없다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군가 말했다. 수액을 좀 맞으라고. 수액을 맞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수액을 다 맞고 몸이 휘청했지만 수액을 맞고 나서는 조금 괜찮아졌다.
그 이후로 난 운동을 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운동을 하다가 더 아플까 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 같아서 몸을 사리게 됐다. 이겨내서 건강해지려고 애쓰지 않고 휴식이 필요하면 쉬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전 내내 자는 날도 있었다. 나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동시에 체력은 더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운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외국에 살던 친구가 한국에 들어온 한 달 동안 아들과 수영을 배운다고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친구를 자주 만나고 싶은데 자꾸 수영일정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웠다.
“내가 수영장에 갈까? 난 자유수영하고 넌 강습받은 다음에 커피 한잔 하면 되잖아.”
“그래, 그러자!”
어른이 되고 나서 레일이 있는 수영장에 들어와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난 어릴 때 수영을 배워서 물이 무섭거나 수영을 못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머리를 물에 넣는 게 조금 무서웠다. 어르신들이 물놀이하듯 머리를 내밀고 평영을 하곤 했다. 물놀이를 하러 가거나 바다에서 놀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몇 번을 갔는데 친구와 아들이 너무 설렁설렁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아니, 2:1로 배우면 레슨비도 비쌀 텐데 너무 설렁설렁하는 거 아니야? 돈 낸 만큼 빡세게 해야지!”
“난 물이 무서워서 여태 수영을 못 배웠어. 너무 빡세게 하면 난 아마 수영장에 오지 않을 거야.”
“넌 그렇다 쳐도 아들은 체력도 좋은데 더 열심히 시켜!”
“얘도 너무 많이 시키면 안 오려고 할걸? 난 수영을 싫어하지 않게 가르치고 싶어.”
“이건 이 나라의 여유가 아니다. 외국의 여유야!”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내가 여태 가지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돈을 내면 돈 낸 거 이상으로 다 뽑아내야 한다는 게 우리나라의 기본 상식이 아니었던가. 친구는 여유를 가지고 충분히 쉬면서 수영을 했다. 하지만 배운 것은 정확히 복습하려고 노력했다. 꼭 돈의 문제도 아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가 아닌 새로운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친구가 다시 돌아갈 즈음, 우리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마침 코로나가 끝나가던 무렵의 여름이라 어린이수영장은 이미 다 마감되었다. 아이들과 그 시간에 레슨을 받기로 했다. 3:1로 하니 수업료도 조금 저렴해졌다. 선생님은 우리 둘째보다 4살 어린 딸이 있어서 대화도 잘 통했다. 아이들도 잘 적응했고, 수영 후 잔치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오는 루틴은 무더운 여름날의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나는 내가 수영 개인레슨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 키우느라 돈이 없기도 했고, 수영에 딱히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개인레슨을 시작해서 지금 일 년이 넘게 지속하고 있다.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수영을 하면서는 힘이 들 때는 있어도 몸이 아프진 않았다. 잘 안 되긴 해도 못 하는 동작은 없었다. 하다 보니 내 몸을 일으키려면 전문가의 개별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가 안 된 몸으로 갑자기 남들 하던 운동을 따라 하다 보니 탈이 났던 거다.
올해 상반기에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수영장 공사와 여행으로 많이 쉬었지만 이후에도 계속 다니고 있다. 빡세게 돈값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열심히 할 수도 없었다. 초반에는 선생님이 욕심을 내서 조금 더 시키기도 했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몸져누워서 다음 레슨을 갈 수가 없었다. 한 달에 한번 그날이 되면 컨디션이 더 떨어져서 빠지기 일쑤였다. 때로 조금 잘 되는 날 내가 욕심을 내면 또 어김없이 아팠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나를 잘 살핀다. 내 체력을 이제야 알겠다며 한번 더! 를 외칠 땐 그만하라고 말린다. 오늘 한번 더 하는 것보다 다음에 오는 게 낫다면서.
수영을 시작한 때는 내 마음이 가장 아프고 힘들었을 때였다. 물론 엄마가 아픈 모든 시간이 무너지고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게 오는지. 그것을 견디고 지키는 시간이 얼마나 고되고 가슴이 아픈지. 지난 시간 누군가의 장례식에 내가 위로를 제대로 한 적이 있었던가. 그 모든 내 모습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 건지 정말 몰랐다.
그 힘든 시간을 수영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바퀴 돌고 수다 떨고 또 한 바퀴 돌고 수다 떨다 집에 왔다. 그래도 팔을 몇 번 돌리고, 발차기를 하면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 수영장까지 가는 것으로 내 운동을 다 했다며 걷고 스트레칭만 하고 오는 날도 있었다. 너무 늦게 가서 30분밖에 못 하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갈 수 있는 날은 꾸역꾸역 갔다. 체력을 키운다고 나를 몰아붙이지 않고, 돈 아까우니 돈값만큼 하겠다고 무리하지도 않았다. 아주 느리게 배워나갔지만 나에게 중요한 건 수영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었다. 그냥 하는 거였다. 내 의지로는 못 했을 일이다.
내 몸에 병은 없었지만 내 마음은 짓눌리고 아팠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았다. 나를 위한 일은 제일 뒤로 미뤄두고 가족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하며 살았다. 비행기의 산소마스크도 어른이 먼저 쓴 다음 아이를 씌워주는 게 순서인데, 난 여태 숨을 참으며 아이들과 어른들을 먼저 돌봤던 것 같다. 내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숨을 쉬어야 모두를 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 찾아왔고, 우린 너무 애를 쓰며 잘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견디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는데 너무 애를 쓰고 긴장을 하면서 살았다. 몸이 아플 수밖에.
나는 오늘,
조금씩 긴장을 덜 하려고 노력한다.
애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많이 힘이 들면 쉰다.
쉬는 나를 칭찬한다.
무리가 되는 일정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내 몸을 위하는 방법이다. 너무 구르다 많이 닳아버린 내 몸뚱이를 지키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