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roño - Najera
로그로뇨 - 나헤라
걷는 것은 기도와 같다
6시쯤 나와 로그로뇨를 걷는데 엄-청 큰 보름달이 환하게 떠있다. 하늘 높이 떠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낮게 땅에 곧 떨어질 것 같은 높이에 떠있다.
조금 있으니 뒤에는 해가 떠오르면서 해와 달이 내 앞뒤로 서로 마주 보게 되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진다. 달이 저렇게 크게 않았다면, 저런 강렬한 빛을 내지 않았다면 아마 해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달도 해 못지않게 밝다. 차분하고 너그럽게 하지만 힘찬 빛을 마지막까지 내고 있는 달이다.
오늘 한국은 추석이다. 아무리 멀고 시차가 있어도 우리가 보는 해와 달은 하나라는 것을 떠올리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달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스페인의 시공간과 차원은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한국에서는 모두 저 달님에게 소원을 빌고 있겠지? 달은 그들의 소망에 응답이라도 하려고 저렇게 크고 반짝이는 것일까? 나도 오늘만큼은 달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보고 싶었다.
요 며칠 누군가의 투병 소식이 들려와 계속 마음이 쓰이고 눈물이 났다. 나는 당신이 덜 아프면 좋겠다. 그의 고통도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왔다가 점차 희미해져 버리길 간절하게 바란다.
아득해지도록 소원을 빌고 나니 오늘은 감히 그들을 위해 걸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위해 걷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도움이 되겠냐 마는... 나만의 이 행위와 의식이 아무도 모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한 한 번의 기도가 될 수만 있다면. 그래.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이런 것들 뿐이지만 무능력하고 쓸모없음을 한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걷는 것은 기도와 비슷하다. 걸으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걷는 것 자체가 마치 기도 같다. 기도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복잡하고 간절하고 때로는 간사한 마음의 고백들을. 그래서 나에게 걷는 것은 기도와 같으며 일종의 명상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마침 오늘은 크게 오르막 내리막 없는 평탄한 길을 30km 가까이 걸어야 하니 기도와 명상에는 좋은 길이 될 것 같다. 간절함 하나 장착하고 그늘 없는 들판과 포도밭 사이를 계속 걸어간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첫 번째 나바레떼(Navarrete)마을은 쉬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다음 마을 벤토사(Ventosa)까지는 7km나 더 걸어야 했다.
벤토사 마을에 가까워오니 지루할 수 있는 논길 사이로 유머 있는 페인팅 작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 뒷 배경과 이어지는 작업들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바로 찻길을 마주하는데 <부엔까미노>라는 간판의 식당이 있어서 고민 없이 들어가 오늘의 첫 콜라를 주문했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콜라의 탄산이 터지는 소리가 시원하다. 얼음 잔에 레몬 슬라이스 하나 딱 띄어서 주는 바텐더 같은 사장님의 망설임 없는 손기술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야외에 앉고 싶어 뒤쪽으로 가보니 역시나 메그가 먼저 와 있다. 걸음이 빨라 길에서 보기 힘든 친구들이 여기다 모여있어서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속도가 빠른 친구들은 곧이어 자리를 뜨고 나와 비슷한 속도의 사람들로 테이블은 다시 채워진다. 팜플로나에 함께 도착했던 폴란드 C 아저씨가 들어왔다. 나와 속도가 비슷해서 길에서 늘 마주쳤던 이름 모를 유럽 언니도 빈자리에 앉는다. 자주 마주치던 그녀와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이탈리아 사람이라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C가 조금 이탈리아어를 해서 중간에서 도움을 주었다.
자, 이제 나헤라까지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봤던 농장과는 차원이 다른 포도밭이다. 밭 초입에는 누군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을 것 같은 와인 양조장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적포도와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간다. 포도는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어서 누군가는 호기심에 한두 개 따 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농장 사람이 트랙터로 포도 수확을 하고 있다. 한가득 담긴 저 청포도들은 화이트 와인이 되겠지? 축제가 열리겠구나! 포도 수확하는 풍경을 보니 내가 다 신이 났다. 사진을 찍으니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대풍년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멋있는 포도밭 사이로 순례길을 내어줘서 고마워요.
우리가 알베르게에 실패하지 않는 이유
목적지인 나헤라에 알베르게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있었다. 메그와 나는 어제 알베르게 예약을 시도했으나 두 자리 빈 곳이 없어서 결국 한자리 씩 남은 알베르게에 각각 따로 묵게 되었다. 알베르게 간 거리가 꽤 멀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오늘이 가장 치열한 예약이었지만 아직까지 노숙하거나 다른 마을로 갈 일 없이 어찌어찌 숙소는 해결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하루 전날에 내일 목적지를 정하고 '까미노 닌자'앱에서 마을의 숙소를 확인한다. 더블 체크하기 위해 구글 지도도 찾아보면 대부분 사진이나 후기, 평점을 볼 수 있다. 또 한국 커뮤니티에서 여기 가지 마세요 하는 알베르게도 있고 일본 커뮤니티에도 그런 정보가 있으니 그런 곳만 피하고 몇 가지를 고려해 가고 싶은 우선순위를 함께 정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중요한 건 내가 얼마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 보다 무엇을 피하고 싶은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종차별이나 무례한 곳은 기분을 망치는 일이니 피하고 싶었고 대신 어느 곳에서도 친절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베드 버그도 피하고 싶은 1순위였지만 물리는 건 복불복이라고 하니 물렸을 때 너무 좌절은 말자고 생각했다. 선호하는 것이나 기대하는 것을 줄이고 피하고 싶은 것 최소한 몇 가지만 생각하니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낮아진 것이다.
알베르게는 공립과 사립이 있다. 공립은 규모가 큰 반면 그만큼 한 곳에 여러 명이 자기도 하고 시설이 고급 지거나 막 그렇게 좋지는 않다. 때문에 좀 더 깨끗하고 조용한 사립 알베르게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메그와 나는 두 가지 모두 매력 있다고 생각해서 공립과 사립 구분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선택하고 있다.
공립은 예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이 경우 당일 조금 빨리 출발해 선착순 안에 들려고 노력한다. 사립은 당연히 예약을 받고 공립도 받는 곳이 많았다. 인상적인 것은 공립과 사립 모두 당일 거처가 없는 곤란한 순례자들에게 간이침대라든지, 침대 하나는 비워둔다는지 하는 대비책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숙소가 없거나 마음에 안 들어서 고생한 적은 없다.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이 많이 된다. 꼭 동행이 없더라도 주변의 순례자들과 정보와 도움을 서로 주고받으며 갈 수 있다.
내가 까미노에 온 것은 9월이니 순례자들이 가장 많은 7~8월은 숙소 예약이 더 치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까미노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생장과 론센스바예스, 수비리까지 예약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대신 까미노를 시작하면 상황들도 좀 보이기 마련이니 그때 상황 파악을 잘하고 대응하면서 목적지와 숙소를 찾아가면 된다. 너무 붐비는 마을이나 대부분 선호하는 루트에서 벗어나 작은 마을에 머무르는 것 또한 여유 있게 까미노를 즐기는 방법이다.
예약은 까미노 관련 어플과 구글 지도에 숙소에서 공개한 전화나 왓츠앱이 있으니 이를 이용했다. 스페인 말을 못 해도 영어로 도착 날짜, 인원수, 이름 정도만 간단히 알려주면 되니까 전화예약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왓츠앱이나 이메일을 보낼 때는 번역기를 돌려서 스페인어로 보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영어로 보내도 그들이 번역기를 돌릴 것이니 아무 문제없다.
지난번엔 숙소 예약할 때 보내려고 번역기 돌려 스페인어로 쓴 글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메그가 귀엽다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왜 그런고 하니 너무 정중하게 비즈니스 메일 쓰듯 작성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복인지 메그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서 그 덕을 진짜 많이 보고 있다. 하지만 매번 메그가 예약하게 두는 건 실례이다. 가끔은 내가 예약도 하고 저녁 먹을 식당이나 마트 위치를 알아본다든지 하면서 다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알아서 하고 있다.
나헤라의 숙소는 뭔가 어설퍼 보이기도 했지만 1층짜리 침대가 있다는 점과 바로 옆에 중국 식당이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씻고 누우니 아무것도 하기가 싫으다. 도시 구경도 오늘은 패쑤다. 우후후. 나는 여행가이지만 의외로 집순이기도 해서 혼자 있으면 대부분 가만히 숙소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메그와 내가 잘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와 정 반대로 아주 체력이 좋고 마을 구경하길 좋아하는 강한 여성이다. 그러니 게으른 나를 조금씩 잡아 이끌어 주어 고맙고 다행이지 않은가.
오늘 각자의 숙소가 떨어져 있으니 중간에서 만나자고 재차 얘기했지만 결국 중국 식당이 있는 이곳으로 메그가 오게 되었다. 괜히 미안해서 중간지점까지 마중을 나갔다. 해가 질 때도 스페인의 해는 어쩜 이리도 이글거리던지! 손으로 해를 가리며 메그가 오는 방향을 보고 있는데 강렬한 해 앞으로 더 강렬한 그녀가 쓱 올라온다. <나쁜 녀석들>에서 나올법한 힙한 BGM과 함께.
아 진짜 이 언니 체력과 멋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식당으로 갔는데 야콥이라는 친구가 식당에 와 있었다. 다행히 그는 메그와 같은 숙소라 저녁을 먹고 메그가 혼자 돌아가지 않아도 되어 안심이 되었다.
오랜만에 중국음식이라고 신나서 메뉴델디아 주문하는데 나의 선택에 식당 직원이 눈 한쪽을 찡긋하며 엄지 척을 한다.
"이거 진짜 맛있어. 한국 사람들이 다 좋아해. 너-무 잘 골랐어."
이런 말을 스페인어로 두세 번은 말한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음식은 너무 맛있었는데 양이 너무 많았고 위가 줄어서 많이 남기게 되었다. 괜한 오해는 마시라고 나가면서 나도 엄지 척을 해주었다.
"무이비엔 Muy Bien!(아주 좋아) 께 부에노 Que bueno! (맛있어!)"
숙소로 돌아와 빨래를 확인하니 아직 덜 말라있다. 내일 아침까지 둬야 하나.. 보통은 저녁엔 말라서 배낭 짐을 미리 싸두고 자는 데 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에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본다.
손톱이 걸리적거려 날짜를 세어보니 벌써 까미노에 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 까미노에서 첫 발톱 손톱을 깎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Bonus!
* 나헤라 알베르게 : Albergue El Peregr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