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 만난 허영심 아저씨

Na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by OHz 오즈

나헤라 -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나헤라의 새벽


새벽에 누군가 깼는데 그대로 소음과 빛이 전해져서 나도 덩달아 깨났다. 숙소 전체가 하나의 높고 큰 벙커에 칸막이로 나눠져 있어서 방음이 안 되는 구조였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좀 더 자야지 했는데 다시 잠이 오진 않았다. 침대에서 휴대폰을 보다가 결국 5시쯤 일어났다.


짐을 가지고 1층으로 내려와 침실에서 가장 먼 공용 키친으로 향했다. 내가 만드는 소음에 또 다른 순례자들이 깨길 원치 않았다. 문제는 조명인데 이곳이 불도 공유가 돼서 한 곳에 불을 켜면 침실까지 환해진다. 나와 비슷하게 나와서 준비하는 순례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헤드랜턴을 쓰고 있었다. 오호! 그래 나도 헤드랜턴을 켜고 짐을 싸면 되겠구나. 어떤 친구들은 식당에서 아침까지 차려 먹는다.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을 끼고 포크로 식사를 하는 모습이라니. 꾸러기들의 연극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밖에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서 후닥 나왔는데 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아마 아침을 먹으러 저기 불 켜진 바에 들어간 것 같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두운 길을 혼자 걷게 되다니.

도심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저기부터는 외진 언덕길로 들어가는 길이다. 앞뒤에 아무도 없고 너무 무서운데 어쩌지. 조금만 기다려 볼까 하고 머뭇머뭇 서성거려도 아무도 안 온다. 어쩔 수 없지. 용기를 내고 일단 가보자.


그리곤 그 길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가 후달리고 후회가 되었다. 한국이라면 혼자서는 절대 이 시간에 외진 곳을 올리 없는데. 이렇게 깜깜한 길을 혼자 미쳤다고 내가.. (자책 중..) 무서워지니 빨리 걷기도 무섭고 느리게 걸어도 무섭고 그렇다고 무서워서 멈춰 서 있을 수도 없는 요상한 상태가 되었다. 좌우로 조명을 비춰보니 뭔가 범상치 않은 독특한 지층이 보인다. 얼마큼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게 더 무서웠다. 어쩔 도리는 없다. 그냥 이런 채로 가는 수밖에는.


다행인지 아닌지 뒤에 누군가 온다. 빛도 없이 어둠 속을 걸어오는 저자(저것? 저놈?)는 누구인가? 평소 같으면 더 무서웠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이 너무 극한으로 무섭기 때문에 저게 귀신이라도 붙잡고 싶었.. 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도를 늦춰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사람이다.

휴...


"혹시 빛 필요해?"

빛이 없길래 내가 먼저 물었다.

"어 물론이지. 고마워."

"사실 나 엄청 무서웠는데, 당신은 빛이 필요하니까 좀 밝아질 때까지 내 헤드랜턴으로 같이 걸을까?"

"좋아"


키가 아주 큰 이 아저씨는 호주에서 온 그렉이다. 다리가 길어서 성큼성큼 빨리도 걷는다. 나는 그를 놓칠세라 옆에 바짝 붙어서 마치 그를 호위하듯 빛을 비추며 빠르게 걸었다. 나의 세 걸음이 그의 두 걸음 정도 되었지만 그를 절대 놓칠 수 없다.


수비리에서 마리오와 걸을 때는 둘 다 무서워서 기억도 안 날 수다를 엄청 떨었는데. 그렉 아저씨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또 과묵해서 편안했다. 우리는 나란히 걷다가 해가 뜰 때쯤 멋진 배경을 뒤로 서로 독사진도 찍어주면서 쿨하게 헤어졌다.

이제 좀 천천히 내 속도대로 걷는다. 주변이 밝으니 이렇게나 예쁜 길이었구나. 어제 낮게 떠있던 달도 이제는 조금 하현달이 되어 높이 떠 있었다.


아소프라(Azofra) 마을에 들어서고 쉴 곳을 찾아야 했다. 메그는 어디쯤 왔을까? 저기에 순례자들이 떠나고 또 들어가는 바가 보인다. 이제 막 떠나려는지 배낭을 메고 있는 J가 바 앞에 있다. 함께 걷던 그렉은 주문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J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있어 부르진 못했다. 아프던 무릎은 괜찮을까? 그래도 역시 빠른 친구들과 잘 가고 있구나. 힘내! 나도 커피와 주스를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까미노에서 만난 허영심 아저씨

구름 없는 파란 하늘, 뜨거운 태양, 사막 같은 논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 그 사이로 난 길 위에 몸체만 한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걸어간다. 산티아고 순례길하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대표적인 이미지들이 있는데 바로 이 길이 그런 길이다. 봄이면 푸르렀을 텐데 추수가 끝난 가을이라 마치 황량하고 쓸쓸한 사막 같아 보이는 것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밀짚모자를 배낭에 메고 걷는 순례자가 있어서 좀 특이해 보였다. 뒤에서 걷던 나는 어린왕자처럼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모자 예쁘다!"

"고마워"


덴마크에서 온 아저씨 B는 까미노를 셀 수도 없이 많이 왔다고 한다. 적으로 15번 이상은 왔는데 그 이후로는 카운팅 하지 않았다고. 물론 매번 한 길을 완주하지는 않았을 테고 올 수 있을 때 와서 몇 구간이라도 걷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뭔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물어보지도 않은 순례길 경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너무 판에 박힌 내용이라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마치 까미노나 세상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말투도 신경이 쓰였다. 들으면서 "와우 대단해요!"라는 추임새밖에 할 수 없는 대화라니.


<어린 왕자>에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허영심을 만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하면 답례해 주기 위해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 칭찬만 듣고 어린 왕자의 질문은 듣지 않는 사람. 숭배받고 싶어 하는 허영심에게 어린 왕자는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아저씨를 숭배해요. 하지만 이런 게 무슨 소용이에요?



허영심 아저씨와 헤어지고 서서히 오른 오르막길의 끝에는 그늘이 늘어진 쉼터가 있었다. 누군가 아이스박스에 음료를 가지고 와서 팔고 있다. 코카콜라 짝퉁을 하나 사서 의자로 간다.

땀을 잔뜩 흘린 순례자들이 그늘 아래 각자의 자세로 평화롭게 쉬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속도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는 이 시간이 이젠 사뭇 기다려진다. 늘 눈빛으로 응원하는 혼자인 순례자들에게 이상하게 나는 마음이 쓰였다. 각자 혼자인 우리가 서로 걱정하고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어가 다르고 나이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구상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이런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강렬한 경험이며 삶에서 큰 위로가 된다.




깊고 푸르른 두 번째 일요일

이제 20km 내외는 조금 수월해진 느낌이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국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하루 일과 후에는 시간도 체력도 남아서 메그와 동네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곳이 거의 없다. 동네 작은 디저트 바 하나를 발견하고 커피와 달달한 것을 입에 넣는다. 평화로운 평범한 일요일 오후 같다.


역시 국립 알베르게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종 선생님들도 만나고 소은도 만났다.

소은이 내일 아침에 추로스 먹으러 간다고 해서 웬 추로스? 하고 묻자, 같이 걷는 친구가 내일이 마지막 날인데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은이 만난 유러피안 순례자들은 아침, 점심을 길고 제대로 챙겨 먹는 편이고 중간에 바에서도 길게 쉬는 것 같았다. 이들처럼 잘 먹고 길게 쉬면서 하루 종일 까미노 길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반면 메그와 나는 빨리 출발해서 집중해 걷고 빨리 끝내서 나머지 시간을 그 마을에서 느긋하게 보내는 편이다. 다 취향의 차이겠지만, 다음번엔 나도 다른 방식으로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과연..)


오늘은 도밍고(domingo = 일요일)이고 마침 교회가 숙소 근처에 있어서 식사 후에 저녁 미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나도 메그도 천주교는 아니지만 종교와 관계없이 순례길 미사를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예전에는 과학자들 중에 신을 믿는 신앙인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의아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종교와 과학이 마치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아니다. 세상에는 과학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 과학자들이야말로 그런 미지의 영역을 그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종교는 그런 풀 수 없는 영역을 설명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과학적 탐구는 증명해 내야 하고 종교적 신앙은 믿고 받아들인다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다. 결국 둘 다 세상을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고이자 태도이다. 그러니 이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존하며 양립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산토 도밍고 교회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놀랐던 것은 내가 다니던 한국 교회와 정말 정확하게 냄새가 일치하다는 것이다. 성경 책 냄새 같은 것인데 교회 냄새는 세계 공통인 건가 싶을 만큼 100% 일치했다. 교회 안에는 아주 잘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일 교회 갈 때 잘 차려입는 것 또한 전 세계 공통이구나! 그 사이사이로 허름한 옷과 신발을 신은 자들은 바로 순례자들이다.


50분 남짓했던 경건한 미사. 신부님 말씀 중에 "까미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페레그리노" 정도의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는구나.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나도 까미노 위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모두 다치지 말고 건강하게 원하는 곳에 닿기를. 아멘.


까미노는 지역의 교회들을 거쳐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걷는 종교적으로 의미가 큰길이다. 하지만 이 길을 종교적인 이유로 걷는다고 말하는 순례자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각자의 사연과 연유들을 가슴에 품고 있겠지. 종교와 연유가 달라도 우리 모두는 아마 이 길 위에서 매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경건하고 성스러운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산토 도밍고의 해 질 녘 하늘이 푸르다 못해 쨍하게 퍼렇다. 이렇게 짙고 깊은 푸르른 저녁이라니.

까미노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일요일이 이렇게 깊어간다.






Bonus!

-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알베르게 : Albergue Cofradía del Sa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