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할 고비가 찾아왔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 Belorado

by OHz 오즈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 - 벨로라도


나에게 말 못 할 어떤 고비가 찾아왔다


까미노 10일째. 조금씩 잠을 잘 자며, 조금씩 배도 더 고파온다. 대신 누적된 피로감 같은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루만 쉬면 좋겠다는 생각이 매일 간절하다. 그래도 이틀 후면 부르고스에 도착한다. 부르고스에서 최초 연박을 하게 될 테니 그때까지 좀 더 버텨보려고 한다.


7am 산토도밍고에서 출발해 1시간 30분 걸어가면 첫 번째 마을 그라뇽(Granon)에 도착한다. 가장 먼저 푸드트럭이 눈에 띄어 가보니 메그도 와 있다. 우리는 함께 출발해도 걷는 속도가 달라 곧 헤어지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첫 번째 쉬는 곳에서 다시 만난다. 나를 보면 메그는 늘 환하게 웃으며 여기로 오라고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럼 나도 반가움에 함박웃음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은 언제나 좋았다.




길이 조금 지루했는지 피로가 누적되어 몰려오는 건지 오늘 유독 걷는 동안 졸리고 피곤하다. 정말 눈을 반쯤 감고 걸었다. 오르막길이 있긴 했지만 험한 길은 아니었다. 몽롱한 상태로 기계처럼 걷다 보니 잡생각이 안 드는 나름 장점도 있었다. 별일 없고 특별한 만남도 없는 그런 평범한 날이다.


맥락 없이 고백하자면 지금 한 가지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있다. 맹세컨대 평생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변비.

그러니까 7일 전 팜플로나에서 커버 없는 변기를 만난 이후로 약 일주일째 이런 상태로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내심 놀라웠다. 워낙 먹는 것이 적고 활동량이 많아선지 생각보다 괴롭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7일"이라는 숫자가 주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일주일 동안 이럴 수가? 이 이상은 심각한 거 아닌가..? 심리적으로도 불안했지만 몸도 점점 무거워지고 찌뿌둥한 느낌이 커지는 것이 오늘이 어떤 고비겠구나 직감했다.





작은 마을들을 통과해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공원에서 멈춰 선다. 공원에는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무슨 레몬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레몬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돌토돌했지만 무슨 나무인지 끝내 알 길은 없었다. 마을 사람 몇 명은 나와서 쉬고 있을 법 한 공원인데 떠돌이 개 한 마리만 쉬고 있는 순례자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옆의 이탈리아 순례자가 버티다가 결국 빵조각을 내어주고 말았다.


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미국 순례자들.

"자두 좀 먹을래? 오다가 주웠는데 맛있어. 맛 좀 봐."

어디서 주웠는지 자두 몇 개를 나눠준다. 헉. 자두가 변비에 좋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우연인가 하늘의 각본인가?!!

함께 자두를 먹으며 순례자 토크(어디서 출발했고 오늘 어디까지 가고 등)를 하다 보니 어디서 또 주웠다며 생 아몬드를 꺼낸다.

"이것도 딴 거는 아니고 다 땅에 떨어져 있는 거 주워 온 거야."

순간 올레길의 유쾌하고 다정한 아줌마들을 만났을 때가 데자뷔처럼 떠오른다.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아줌마들의 정서는 어디에도 비슷하게 있구나 생각하니 반갑고 정겹다.





벨로라도에 가까이 왔을 때쯤 일본인 Y와 이탈리아 E를 만났다. 그런데 E의 상태가 절박하고 심각해 보인다. 무릎이 심하게 아픈지 거의 울면서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Y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듯했다.


나도 첫날부터 무릎이 아팠던지라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다리로 걷는다 생각하지 말고 걸어봐. 배로 걷다가 힘들면 허벅지로, 그러다가 또 엉덩이로, 그러다가 힘들면 또 스틱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무릎이 아닌 다른 곳을 돌려써가며 걷다 보면 무릎이 덜 아파지고 다른 곳에 근육이 생기는 것 같아.

나는 첫날부터 무릎이 아팠는데 이제 좀 나아지는 중이야. 너도 분명히 나아질 거야."


어찌 보면 내가 무릎이 성치 않았을 때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나에게 주던 응원을 되돌려 준 것이기도 했다.

"나는 발이 너무 아팠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몸이 터득하고 적응해 가더라. 너의 무릎도 반드시 그럴 거야. 그러니 힘내."

스페인 친구가 했던 말인데 당시 정말 힘이 되었었다. 그녀도 나의 말에 조금 힘을 내면 좋으련만.. 그녀의 무릎은 사실 매우 안 좋아 보였다.


마을까지 다 왔으니 어찌 되었든 조금 더 힘을 내서 그녀 스스로 숙소까지는 가야 했다. 숙소를 알아봐야 한다는 그들에게 인사하며 다른 때보다 더 힘주어 말했다.

"부엔까미노!"

이 말은 마치 까미노 위의 "아멘"같았다.





One Fine Day

점심쯤 도착해서 어서 씻고 나왔다. 시에스타가 2시부터 시작이라 그전에 장을 봐야 했다. 점심거리는 간단한 인스턴트 샐러드 그리고 맥주와 함께 먹을 과자를 골랐다. 저녁은 오랜만에 부엌에서 만들어 먹기로 했다. 참지와 올리브를 곁들인 샐러드와 일본식 볶음 라면이 되겠다. 메그가 일본에서부터 가져온 간편 조리 국물까지 곁들이면 꽤 훌륭한 저녁이 될 것 같다.


시에스타시간이 풀린 4시. 변비약을 사 보기로 한다. 약국 가기 전에 변비약 달라는 내용을 스페인어로 번역기 돌려서 메그에게 보여주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걸 보더니 피식 웃으며 함께 가주겠단다. 변비약이 아니라 설사약(설사를 일으키는 사하제)으로 번역이 되었던 거다. 비슷하지만 다를 거라면서 도와주겠다고 앞장서는 메그를 나는 또 좋다고 졸졸 따라나간다. 메그 아니었으면 설사약 먹고.. 어휴... 아찔했다.


여기저기 광고에서 많이 봐서 익숙한 그 이름 둘코락스를 받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아 맞다 빨래! 마음은 뛰어가지만 아픈 내 발은 뒤뚱뒤뚱 오리 같다. 마당 건조대에 널려있는 순례자들의 옷을 서둘러 안으로 들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준 것 같아 조금 행복해졌다.


비가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잠시 숙소 창가에 앉았다. 누구나 비 오는 날에 생각나는 노래 하나쯤은 있다. 나에겐 오래전 보았던 영화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와 그 OST가 그렇다. 어쩌다가 내가 그 테이프를 가지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방에서 보게 된 그 영화는 우울한 하늘에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싱글맘 미셸 파이퍼의 곧 터질 것 같은 감정선 따라 내 마음도 아슬아슬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비극적인 내용과는 반대로 전쟁 같은 하루의 끝에 무너지려고 하는 순간 선물 같이 사랑을 만난다는 내용이 편안하고 낭만적이었다. 특히 나탈리 머천트의 노래 <One Fine Day>는 영화 전반의 분위기를 이끌며 주인공들의 감정과 비 오는 날의 감성을 저며 들게 했다.


알베르게 창가는 벌써 약간의 습기로 뿌옇게 흐려졌다. 그 위로 또르르 길을 내는 빗방울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참 별일 없어서 좋네.'





비는 금방 멈추었다. 저녁을 맛있게 차려먹고 침대에 누워 밤 9시가 되기만을 기다린다. 기상 8시간 전에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8시 30분이 되자 친구를 기다리는 여우 같은 마음이 된다. 이제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니 메그가 9시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가만히 누워서 9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초초함에 5분 간격으로 메그에게 이제 먹을까? 하고 물으며 못살게 굴어도 본다. 변비약 하나에 세상 초조해진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내 생에 첫 변비라는 고난을 준 까미노. 까미노에서 말 못 할 고비는 뜻밖에도 이런 것이었다. 고비란 산꼭대기 같은 것이니 오늘이 고비면 내일은 넘어가겠지. 다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약이라 먹고 난 후의 상태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밤 사이에 약이 아주 잘 들기만을 바라며, 복용 방법대로 9시 정각에 두 알 깔끔하게 먹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제보다 잠을 더 잘 자며 기억도 안 나는 꿈을 꾸었다.






Bonus!

- 벨로라도 알베르게 : Albergue municipal El Corro